작품 소개
천하를 피로 물들였던 절대자, 천마 백무진. 마교의 배신과 정파의 포위 속에서 최후를 맞이한 그는 눈을 뜨자마자 믿을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한다. “사형, 정신이 드십니까?” 그가 환생한 몸은 정파 제일검문인 청운문의 막내 제자, 진서하. 무공은 형편없고, 사형들에게 무시당하며, 문파에서 쫓겨날 날만 기다리는 열여덟 살 소년이었다. 더욱 기막힌 사실은 청운문이 전생의 자신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원수라는 것. 복수를 위해서는 천마의 정체를 숨겨야 한다. 하지만 문파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진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전생의 무공을 드러내고 만다. “방금 그 무공은 대체 어디서 배운 것이냐?” 정파의 막내로 살아가는 천마. 그를 죽인 정파의 숨겨진 진실. 그리고 전생의 죽음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 천마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는 순간, 무림의 운명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번 생에는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는다. 정파든 마교든, 내 앞을 막는 자는 모두 베겠다.” 작품의 핵심 문장 천하를 피로 물들였던 천마가 자신을 죽인 정파의 막내 제자로 환생했다. 천마 백무진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가슴에 박힌 세 자루의 검 때문만은 아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기에는 너무 오래 천하의 정상에 서 있었다. 그가 죽음을 예감한 진짜 이유는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 때문이었다. “결국 네놈이었군.” 백무진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 앞의 사내가 천천히 복면을 벗었다. 창백한 얼굴과 길게 찢어진 눈. 마교의 총군사 독고현, 백무진이 천하에서 유일하게 등을 맡길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교주님.” 사과하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첫 번째 검은 오른쪽 폐를 관통했고, 두 번째 검은 단전을 부쉈다. 마지막 검은 심장에서 손가락 두 마디 떨어진 곳에 박혀 있었다. 독고현이 조금만 힘을 주면 모든 것이 끝날 터였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구나.” 백무진이 피 섞인 웃음을 흘렸다. “예전부터 거짓말에는 재주가 없었지.” 독고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혈마곡에는 수백 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마교의 장로와 호법, 정파의 검수와 도객, 전쟁에 휘말린 백성들까지. 백무진은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싸웠다. 첫날에는 정파의 검진을 부쉈고, 둘째 날에는 마교의 반역자들을 베었다. 셋째 날에는 자신이 직접 키운 호법들의 목을 잘랐다. 그들은 모두 죽기 직전 같은 말을 했다. 교주가 너무 강해졌다고. 백무진 한 사람 때문에 정파와 마교의 균형이 무너졌다고. 그가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우스운 일이었다. 백무진은 무림을 지배하려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오늘, 백 년 넘게 이어진 정마대전을 끝내겠다고 선언할 예정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은 독고현뿐이었다. “내가 전쟁을 끝내는 것이 두려웠느냐?” 독고현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무너진 바위 뒤에서 일곱 명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소림의 금강신승, 무당의 태허진인, 남궁세가의 검왕. 그 중앙에는 정파 제일검문 청운문의 대장로 청검 진인 유정천이 있었다. 유정천의 흰 도복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사흘 동안 싸움을 숨어서 지켜보다 백무진의 힘이 다한 뒤에야 나타난 것이다. “천마, 네 악행도 여기까지다.” 백무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에 쓰러진 백성 중에는 어린아이도 있었고 칼을 들 힘조차 없는 노인도 있었다. 정파 무인들은 혈마곡 근처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마교의 첩자라 몰아 죽였다. “저들을 죽인 것도 내 악행이냐?” “마교와 가까이한 자들이 자초한 일이다.” “역시 정파는 편리하군. 자신들이 죽인 사람도 내 죄가 되니 말이다.” “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사람들이다.” 백무진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말대로라면 내가 너를 죽여도 네가 이곳에 온 탓이겠군.” 유정천을 비롯한 고수들이 일제히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이미 죽어 가는 백무진이었지만 누구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는 열다섯에 마교의 모든 무공을 익혔고, 스물셋에 전대 교주를 꺾었으며, 서른 전에 정파 십대고수 중 일곱을 굴복시킨 괴물이었다. “독고현, 어서 끝내라.” 유정천의 명령에도 독고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주님, 천마옥은 어디에 있습니까?” 천마옥. 역대 천마에게 전해진다는 마교의 성물이었다. 하지만 백무진이 교주가 되었을 때 그것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내게 없는 물건을 찾고 있었느냐?” “천마옥 없이는 천마신공의 마지막 경지에 오를 수 없습니다. 교주님이 그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천마옥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남이 만든 길만 따라가서는 정상에 설 수 없다. 내가 네게 가장 먼저 가르친 말이었을 텐데.” 독고현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유정천에게 향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긴장을 백무진은 놓치지 않았다. “내 마지막 질문에 대답해라. 언제부터 나를 배신할 생각이었지?” 긴 침묵 끝에 독고현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부터였습니다.” 백무진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열세 살에 마교로 끌려온 독고현을 구한 사람이 자신이었다. 글과 병법을 가르치고, 누구도 출신을 문제 삼지 못하게 했으며, 교주가 된 뒤에는 총군사의 자리를 맡겼다. 형제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믿었다. 처음부터였다는 한마디가 가슴의 검보다 깊이 파고들었다. “그런가.” 분노 대신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믿음이란 결국 약점이었다. 천하제일인도 그 약점 하나 때문에 무너졌다. 독고현의 검이 조금 더 깊이 들어왔다. 백무진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끝내겠습니다.” “그래. 끝내 보아라.” 독고현의 손에 힘이 들어간 순간 백무진이 눈을 떴다. 검붉은 광채가 그의 눈동자에서 폭발했다. 쿠구구궁! 혈마곡 전체가 흔들렸다. 절벽에 금이 가고 바닥의 수백 자루 무기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정파 고수들이 다급히 검을 뽑았다. “놈에게 아직 힘이 남아 있다!” 독고현이 검을 뽑으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백무진이 맨손으로 검날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바닥이 찢어졌지만 놓지 않았다. “내가 죽더라도 나를 죽인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천마신공 최후의 절기, 천마멸천. 생명과 단전을 불태워 주변의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동귀어진의 수법이었다. 유정천이 외쳤다. “피해라!” 정파 고수들이 달아났다. 독고현은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품에서 검은 구슬 하나를 꺼내 백무진의 가슴에 밀어 넣었다. 표면에는 날개 없는 용이 새겨져 있었다. 천마옥이었다. 구슬이 닿는 순간 세상의 소리가 멀어졌다. 검붉은 불꽃도, 무너지는 절벽도 느리게 움직였다. 독고현의 입술이 움직였다. 살아남으십시오. 콰아아아앙! 혈마곡이 무너졌다. 백무진의 육체가 산산이 부서졌다. 마지막 순간 그는 독고현이 웃는 것을 보았다. 슬픔인지 안도인지 알 수 없는 미소였다. 그렇게 천마 백무진은 죽었다. 퍽! 옆구리를 걷어차인 충격에 백무진은 눈을 떴다. 곰팡이가 핀 나무 천장과 빛바랜 휘장이 보였다. 눅눅한 이불 냄새, 약초 냄새, 오래된 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일어나. 언제까지 자는 척할 거야?” 머리채가 잡혀 상체가 억지로 일으켜졌다. 흰 무복을 입은 덩치 큰 소년이 눈앞에 있었다. 가슴에는 푸른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청운문. 백무진은 본능적으로 내공을 끌어 올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전은 텅 비었고 혈맥은 바싹 마른 개울처럼 막혀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졌다. 낯선 기억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진서하. 열여덟 살. 청운문 외문제자.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청운문에 들어왔지만 오 년이 지나도록 기본 심법조차 익히지 못했다. 동기들이 내문으로 올라가는 동안 그는 장작을 패고 물을 길었다. 사람들은 그를 둔재, 겁쟁이, 문파의 수치라고 불렀다. 마지막 기억은 어젯밤이었다. 진서하는 숲속 창고로 끌려갔다. 영약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처음으로 거절하자 주먹과 발길질이 쏟아졌다. 새벽까지 차가운 바닥에 버려졌고, 살려 달라고 부를 힘도 없을 때 심장이 멎었다. 그리고 천마 백무진이 그 몸에서 눈을 떴다. ‘환생한 것인가?’ 진서하의 기억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부모를 잃은 슬픔, 처음 청운문에 들어왔던 기대, 무공을 익히지 못할 때의 절망, 사람들의 조롱을 들으며 삼킨 눈물이 자신의 감정처럼 생생했다. “눈깔을 왜 그렇게 떠?” 소년이 그의 뺨을 두드렸다. 기억 속에서 이름이 떠올랐다. 장태석. 내문제자인 형을 믿고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외문제자였다. 진서하를 죽인 장본인이기도 했다. 뒤에는 박두칠과 고상문이 서 있었다. 어젯밤 진서하의 팔을 붙들었던 자들이었다. “내놔.” “무엇을 말이냐?” “오늘 받은 소환단. 어제 숨겨 뒀다고 했잖아.” 소환단은 한 달에 한 알 지급되는 하급 영약이었다. 장태석은 지난 삼 년 동안 진서하의 영약을 빼앗았다. 이번 달만큼은 진서하가 몰래 숨겼다. 내문제자가 되겠다는 마지막 희망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 것이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내 것을 네놈들에게 줄 이유가 없다.” 장태석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늘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진서하가 자신을 벌레처럼 보고 있었다. “어제 덜 맞았구나.” 주먹이 날아왔다. 백무진에게는 너무 느렸다. 그는 고개를 손가락 한 마디만큼 기울여 주먹을 피하고, 검지로 장태석의 겨드랑이 아래 혈도를 찔렀다. “커헉!” 장태석의 팔이 축 늘어졌다. 이어 명치 아래, 왼쪽 옆구리, 무릎 안쪽을 차례로 눌렀다. 장태석은 숨도 쉬지 못한 채 무릎을 꿇었다. 박두칠이 의자를 들고 달려들었다. 백무진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 몸이 심각했다. 그는 억지로 한 걸음 내딛어 의자 안쪽으로 파고들고, 박두칠의 손목을 잡아 힘의 방향을 비틀었다. 쾅! 박두칠이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고상문은 문 앞에서 얼어붙었다. “너도 할 테냐?” “아, 아닙니다.” “저것들을 데리고 나가라.” 장태석이 이를 갈았다. “내 형님이 알면 넌 끝이야. 오늘 승급 비무에서 네 사지를 전부…….” 백무진의 눈빛이 변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천하의 정상에 오른 자의 살기가 방을 채웠다. 내공이 없어도 영혼에 새겨진 기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내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면 다음에는 네 혀부터 뽑겠다.” 장태석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세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며 달아났다. 문이 닫히자 백무진은 벽을 짚었다. 손끝이 떨리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고작 외문제자 둘을 쓰러뜨리고 지쳤다. “처참하군.” 그는 바닥에 가부좌를 틀었다. 천마신공의 구결에 따라 호흡했지만, 기운이 가슴 부근에서 막혔다. 수백 개의 바늘이 심장을 찌르는 통증이 밀려왔다. 입에서 검은 피가 흘렀다. 백무진은 기운을 실처럼 나누어 몸을 살폈다. 막힌 혈맥과 뒤틀린 근육, 아물지 않은 뼈. 심장 가까이에는 차갑고 끈적한 기운이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쇄맥독.” 극소량을 오래 먹이면 혈맥이 좁아지고 단전이 자라지 않는 독이었다. 진서하가 둔재였던 것이 아니다. 누군가 십 년 이상 독을 먹여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했다. 기억 속에서 비 내리던 밤이 떠올랐다. 어린 진서하는 문밖에서 부모의 대화를 들었다. “이대로는 서하가 죽어요.” “독을 먹이지 않으면 놈들이 아이의 기운을 알아볼 거요.” “그분은 이미 죽었어요.” “아니. 그분은 반드시 돌아온다.” 아버지는 검은 천을 쥐고 있었다. 날개 없는 용이 붉은 실로 새겨진 문양. 천마를 그림자처럼 지키던 비밀 호위대, 흑룡대의 표식이었다. 흑룡대는 혈마곡 전투 한 달 전 사라졌다. 진서하의 아버지가 그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기다렸다는 ‘그분’은 백무진 자신일 가능성이 컸다. 혈마곡의 천마옥, 진서하의 몸에 쌓인 쇄맥독, 사라진 흑룡대. 모든 것이 이어져 있었다. 백무진은 천마신공 대신 청운문의 기본 심법을 떠올렸다. 기운의 흐름을 자신의 방식으로 고쳤다. 막힌 혈맥을 피해 새로운 길을 만들자 배꼽 아래에 먼지 한 톨만 한 온기가 모였다. 텅 비었던 단전에 첫 내공이 생겼다. 그가 눈을 뜬 순간 머릿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고 싶어. 진서하의 목소리였다. 백무진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죽기 직전 진서하가 느꼈던 억울함과 두려움, 단 한 번이라도 인정받고 싶다는 소망이 밀려들었다. “네가 당한 것은 돌려주마. 네가 얻지 못한 것도 내가 얻어 주겠다.” 죽은 소년에게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었다. 댕! 댕! 댕! 소집종이 울렸다. “외문제자는 전부 연무장으로 모여라! 내문 승급 시험을 시행한다!” 오늘은 진서하가 오랫동안 기다린 날이었다. 백무진은 낡은 백색 무복을 걸쳤다. 작은 청동 거울에는 오른쪽 눈가가 멍들고 입술이 터진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이 비쳤다. “정파의 막내라.” 마교의 절대자가 자신을 죽인 문파의 제자가 되었다. 하늘이 있다면 제법 악취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문을 열자 차가운 산바람이 밀려왔다. 구름 사이로 솟은 봉우리와 절벽을 따라 세워진 전각들이 보였다. 멀리 중앙 봉우리에는 거대한 검이 꽂혀 있었다. 십팔 년 전 자신을 죽인 자들이 저곳에 있었다. 백무진은 연무장을 향해 걸었다. 연무장에는 삼백 명이 넘는 외문제자가 모였다. 진서하가 나타나자 곳곳에서 수군거렸다. “저 녀석 살아 있었어?” “어제 장태석에게 끌려갔다던데.” “저 몸으로 시험을 치르겠다고?” 백무진이 보는 곳은 단상 중앙이었다. 백발의 노인 청검 진인 유정천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혈마곡에서 독고현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한 자였다. 백무진의 가슴에서 살기가 꿈틀거렸다. 당장 목을 꺾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의 옷깃조차 건드릴 수 없었다. 복수는 가장 달콤한 순간까지 기다렸다 상대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야 했다. “서하야.” 회색 약당복을 입은 소녀가 다가왔다. 약당 견습제자 소령. 진서하에게 유일하게 친절했던 사람이었다. “또 맞았어?” 소령이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었다. 백무진은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다 멈췄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은 전생에도 드물었다. “이상해. 어제는 맥이 끊어질 듯 약했는데 지금은 전혀 달라.” “잠을 푹 자서 그런가 보지.” “그런 문제가 아니야. 설마 비무를 하려고?” “이미 한 번 죽었으니 괜찮다.” “뭐?” “농담이다.” 백무진이 지나가자 소령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진서하가 농담도 할 줄 알았나?” 외문관 황보광이 단상 앞으로 나왔다. “첫 번째 시험은 비무다! 상대를 쓰러뜨리거나 비무대 밖으로 밀어내면 승리한다. 열 명을 선발해 내문 입문 자격을 주겠다!” 시험이 시작됐다. 백무진은 청운십이검을 분석했다. 부드러운 흐름 속에 날카로운 변화를 숨긴 검법이지만 제자들은 껍데기만 흉내 냈다. 발과 검이 따로 움직였고 시선으로 다음 공격을 알려 주었다. 여섯 번의 비무가 끝난 뒤 이름이 불렸다. “진서하!” 웃음이 터졌다. 백무진이 비무대로 올라갔다. “상대는 장태석!” 반대편에서 장태석이 나타났다. 곁에는 내문제자의 푸른 띠를 두른 형 장태건이 있었다. 장태건이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장태석이 웃었다. 대진을 손쓴 것이 분명했다. “목검을 선택해라.” 장태석은 가장 무거운 목검을 골랐다. 백무진은 무기대로 가지 않았다. “진서하, 검을 들지 않을 것이냐?” “필요 없습니다.”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은 허용하지 않는다.”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검을 들면 저자가 죽을까 염려될 뿐입니다.” 연무장의 웃음이 멈췄다. 장태석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장 시작하십시오! 저놈의 입을 다시는 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황보광이 손을 들었다. “시작!” 장태석이 땅을 박찼다. 목검이 백무진의 머리로 떨어졌다. 청운십이검의 세 번째 초식 낙운참. 맞으면 머리가 깨질 공격이었다. 백무진은 검이 닿기 직전 오른발을 반걸음 내디뎠다. 몸이 검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왼손으로 장태석의 팔꿈치를 밀어 중심을 무너뜨리고, 오른손으로 손목을 스쳤다. 목검이 허공에 솟구쳤다. 백무진은 뒤도 보지 않고 손을 뻗었다. 빙글빙글 돌던 목검의 손잡이가 정확히 손안에 떨어졌다. 검끝이 장태석의 목젖 앞에서 멈췄다. 한 번의 호흡 안에 승부가 끝났다. 삼백 명이 침묵했다. “승자는 진서하!” 그때 장태건이 비무대로 뛰어올랐다. “저 녀석이 암수를 썼습니다! 제 동생의 혈도를 미리 공격했습니다. 둔재 진서하가 정당한 승부로 이길 리 없습니다.” 백무진이 그를 보았다. “직접 확인해 보겠느냐? 네 동생보다 네가 조금 강한 듯하니.” 모욕을 받은 장태건이 진검을 뽑으려는 순간 낮은 목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그만.” 유정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단상에서 내려와 백무진 앞에 섰다. “방금 사용한 탈검수는 어디에서 배웠느냐?” 백무진의 마음속에서 경고가 울렸다. 방금 쓴 것은 자신이 창안한 천마탈검수의 첫 변화였다. 단순화했지만 유정천은 알아보았다. “탈검수라니요?” “시치미를 떼지 마라.” 유정천의 목소리에 내공이 실렸다. 압력이 어깨를 짓눌렀다. 허약한 몸의 무릎이 꺾이려 했지만 백무진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 무공을 누구에게 배웠느냐?” 백무진은 빠르게 생각했다. 평범한 수법이라고 잡아떼면 의심만 깊어진다. “꿈에서 배웠습니다.” “꿈?” “어릴 때부터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무공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몸이 따라 주지 않았지만, 어젯밤 죽을 고비를 넘긴 뒤 그 움직임이 이해됐습니다.” “그 남자의 얼굴을 보았느냐?” “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백무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백무진이라 했습니다.” 단상 위의 장로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십팔 년이 지나도 천마의 이름은 무림의 금기였다. “그가 또 무엇을 말했느냐?”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자신을 죽인 자들을 만나게 될 때까지.” 유정천의 손이 검으로 향했다. 살기가 폭발해 외문제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그때 차가운 인상의 여검수 하연비가 두 사람 사이를 막았다. “대장로님, 이 아이는 청운문의 제자입니다.” “천마의 무공을 사용했다.” “한 번의 수법만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맡겠습니다. 진서하를 내문으로 올려 제자로 받아들이고 직접 지켜보겠습니다.” 제자들이 술렁였다. 하연비는 청운문에서도 손꼽히는 매화검이었다. 수많은 내문제자가 그녀의 가르침을 원했지만 누구도 정식 제자가 되지 못했다. 유정천은 한참 생각하다 검에서 손을 뗐다. “좋다. 오늘부터 진서하의 모든 행동을 보고해라. 허락 없이 문파 밖으로 나가서도 안 된다.” 그가 백무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을 잊지 마라.” 유정천이 돌아섰다. 백무진은 그의 등을 바라봤다. 조금 전 노인의 반응은 공포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것이 돌아왔다는 표정이었다. 하연비가 말했다. “따라와라. 네 몸을 확인하고 꿈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것이다.” “말하지 않겠다면요?” “말하고 싶게 만들어 주마.” 그녀가 먼저 내려갔다. 백무진은 피식 웃었다. 원수의 문파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자신을 감시하는 사부까지 생겼다. 그러나 하연비의 제자가 되면 내원과 장서각에 들어갈 수 있다. 유정천에게 접근할 기회도 늘어난다. 그가 비무대에서 내려오려는 순간 심장 가까이에서 뜨거운 통증이 일어났다. 쿵. 몸속에 검은 구슬이 떠오르는 감각. 혈마곡에서 독고현이 가슴에 넣었던 천마옥이었다. 쿵. 천마옥이 두 번째 심장처럼 뛰었다. 눈앞에 환상이 펼쳐졌다. 무너지는 혈마곡, 피투성이 독고현, 검을 든 유정천. 그리고 두 사람보다 훨씬 뒤쪽의 검은 안개 속에 얼굴 없는 자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일곱 고리가 달린 검이 있었다. 백무진은 그 검을 알고 있었다. 오래전 죽었다고 믿었던 스승, 초대 천마 적천우의 검이었다. 환상이 사라지며 몸이 휘청거렸다. 소령이 달려와 그를 붙잡았다. “서하야! 괜찮아?” 백무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속 천마옥이 다시 뛰었다. 그때 죽은 스승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백무진이 고개를 들었다. 단상 위에서 유정천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의 마지막 그릇아. 백무진의 의식이 환상 속으로 다시 끌려 들어갔다. 이번에 보인 곳은 혈마곡이 아니었다. 눈이 덮인 작은 마을이었다. 낡은 초가집 앞에 젊은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품에는 갓난아이가 안겨 있었다. 진서하의 아버지 진무혁이었다. 기억 속에서 보았던 병약한 아버지와 달랐다. 어깨는 넓었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허리에는 검이 없었지만, 눈밭 위에 선 자세에는 빈틈이 없었다. 초가집 지붕 위로 검은 복면인들이 하나씩 내려왔다. 가슴에는 일곱 개의 고리가 서로 물린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진무혁은 아이를 아내에게 넘겼다. “서하를 데리고 뒷길로 가시오.” “당신은요?” “뒤따라가겠소.” 아내는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함께 가요.” “내가 가지 않으면 아무도 시간을 벌 수 없소.” 진무혁은 품에서 검은 천을 꺼내 아이의 옷 속에 넣었다. 흑룡대의 문양이었다. “이 아이가 자라서 자신이 누구인지 묻거든 말해 주시오. 우리는 마교의 잔당이 아니라 한 사람과의 약속을 지킨 자들이었다고.” “그분은 돌아오지 않아요.” “돌아오실 거요.” 진무혁은 갓난아이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천마옥이 그분을 찾아낼 테니까.” 복면인들이 움직였다. 일곱 방향에서 검이 날아왔다. 진무혁은 맨손으로 첫 번째 검을 흘리고 두 번째 자의 목을 꺾었다. 세 번째 자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쳤다. 검붉은 기운이 폭발하며 세 사람이 동시에 날아갔다. 백무진은 그 무공을 알아보았다. 흑룡십삼수. 흑룡대의 대주에게만 전해지는 무공이었다. ‘진무혁이 흑룡대주였다고?’ 혈마곡 전투 당시 흑룡대주는 얼굴과 이름을 숨긴 채 활동했다. 교주인 백무진조차 그를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모든 명령은 독고현을 통해 전달됐다. 진무혁의 검붉은 장력이 눈보라를 갈랐다. 하지만 복면인들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그중 회색 가면을 쓴 자가 일곱 개의 고리가 달린 검을 뽑았다. “천마옥을 내놓아라.” “네놈들이 가질 물건이 아니다.” “죽은 교주에게 아직도 충성하는가?” 진무혁이 피 묻은 입술로 웃었다. “그분은 죽지 않았다.” 회색 가면의 검이 진무혁의 가슴을 관통했다. 동시에 백무진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환상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청운문의 어두운 방이었다. 열 살쯤 된 진서하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유정천이 아이의 손목을 잡고 맥을 살폈다. “봉인이 아직 유지되고 있습니다.” 뒤에 선 남자가 말했다.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익숙했다. 독고현이었다. “쇄맥독의 양을 늘려야 합니다.” “그러다 아이가 죽으면 천마옥도 사라진다.” “죽지 않을 정도만 먹이겠습니다.” 유정천이 어린 진서하를 내려다보았다. “백무진의 영혼은 정말 이 안에 있는가?” “천마옥이 반응했으니 틀림없습니다.” “십 년이 지났는데도 깨어나지 않았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란 언제지?” 독고현이 어둠 속에서 대답했다. “이 아이가 한 번 죽는 날입니다.” 백무진의 의식이 거칠게 흔들렸다. 장태석이 진서하를 죽인 일도 우연이 아니었을지 몰랐다. 누군가 일부러 괴롭힘을 방치하고, 승급 시험 전날 죽도록 유도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환상 속 유정천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환상을 지켜보는 백무진을 정확히 향했다. “보고 있구나.” 과거의 기억일 뿐인 자가 자신을 인식했다. 유정천이 손을 뻗었다. “아직 깨어날 때가 아니다.” 손바닥이 백무진의 얼굴을 덮었다. “돌아가라.” 백무진이 눈을 떴다. 처음 보는 방이었다. 약초 냄새가 가득했고 천장에는 말린 뿌리와 잎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가슴에서 통증이 일었다. “움직이지 마.” 소령이 약탕기를 들고 다가왔다. 눈가가 붉었다. “비무대에서 갑자기 쓰러졌어. 맥은 뛰는데 눈을 뜨지 않아서 정말 죽은 줄 알았다고.” 백무진은 주위를 살폈다. 약당의 치료실이었다. “하연비는?” “사부님을 그렇게 함부로 불러?” “아직 정식으로 절하지 않았다.” “정신은 멀쩡한가 보네.” 소령이 약사발을 내밀었다. 백무진은 냄새부터 맡았다. 감초, 백작약, 당귀, 그리고 아주 희미한 쇄맥독의 향이 섞여 있었다. 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 약은 누가 만들었지?” “내가 달였어. 왜?” “약재는 누가 골랐느냐?” “약당 창고에서 가져왔지.” “창고 열쇠를 가진 사람은?” 소령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약당주님과 세 분의 의원, 그리고 대장로님이야.” 백무진은 약사발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마시지 않을 거야?” “여기에 독이 들었다.” 소령의 얼굴이 굳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직접…….” “너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약재에 미리 섞여 있었다.” 소령이 은침을 꺼내 약에 담갔다. 색은 변하지 않았다. “독이 없잖아.” “쇄맥독은 은침으로 확인할 수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의 내기와 만났을 때만 독성이 깨어난다.” “그런 독을 네가 어떻게 알아?” 백무진은 잠시 침묵했다. “꿈속의 남자가 알려 줬다.” 소령은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장난으로 여길 상황도 아니었다. 그녀는 약사발을 조심스럽게 천으로 덮었다. “약당주님께 보여 드릴게.” “아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왜?” “범인이 네가 알아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음에는 네 약에 독을 넣을 테니까.” 소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백무진은 손가락 끝으로 약을 한 방울 찍어 혀에 댔다. 독의 농도와 배합을 확인했다. 오랜 세월 진서하가 먹은 것과 같았다. 자신이 깨어난 뒤에도 누군가는 계속 진서하의 성장을 막으려 했다. 아니, 어쩌면 깨어났기 때문에 다시 독을 넣은 것일지도 몰랐다. “오늘 내가 쓰러진 뒤 누가 이 방에 들어왔지?” “나와 약당주님, 하 사부님. 그리고 대장로님도 잠깐 다녀가셨어.” “유정천이?” “대장로님이라고 불러. 직접 네 맥을 짚고 가셨는데, 이상하게 그분이 떠난 뒤부터 네 가슴에 검은 자국이 생겼어.” 소령이 백무진의 옷깃을 조금 열었다. 심장 위에 작은 용 모양의 검은 흔적이 나타나 있었다. 천마옥의 문양이었다. 백무진이 손을 대자 뜨거운 기운이 손바닥을 밀어냈다. “유정천이 이것을 보았느냐?” “보셨을 거야.” 그렇다면 유정천은 자신의 정체를 거의 확신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죽이지 않고 하연비의 제자로 두었다. 천마옥이 완전히 깨어날 때까지 지켜보려는 것이 분명했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소령이 약사발을 등 뒤로 숨겼다. 문이 열리고 하연비가 들어왔다. 허리에는 가느다란 장검이 걸려 있었다. “깨어났군.” “덕분에요.” “내가 살린 것이 아니다. 네 몸이 스스로 버텼다.” 하연비는 소령에게 나가 있으라고 말했다. 소령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백무진을 보다가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하연비가 검을 탁자 위에 올렸다. “이제 둘뿐이다.” “그러니 꿈 이야기를 하라는 겁니까?” “그 전에 확인할 것이 있다.” 하연비가 검을 반쯤 뽑았다. 차가운 검기가 방 안에 번졌다. “네가 비무에서 사용한 수법을 내게 펼쳐라.” “환자를 상대로 비무를 하시겠다고요?” “환자에게서 이런 살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눈이 백무진의 눈을 꿰뚫었다. “진서하는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네 눈은 수백, 아니 수천 명을 죽인 자의 눈이다.” 백무진은 속으로 감탄했다. 하연비는 유정천보다 경지는 낮지만 감각이 날카로웠다. “사람의 눈만 보고 과거를 알아낼 수 있습니까?” “검을 잡는 사람은 안다.” “무엇을 말입니까?” “누군가를 베기로 결심한 눈과 아직 결심하지 못한 눈의 차이.” 하연비가 검을 완전히 뽑았다. “너는 누구냐?” 검끝이 백무진의 목에 닿았다. 그는 웃으며 검날을 손가락으로 밀어냈다. “오늘부터 사부가 되실 분께서 제자 목에 검부터 겨누십니까?” “질문에 대답해라.” “진서하입니다.” “거짓말이다.” “그럼 사부님은 제가 누구이기를 바라십니까?” 하연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검날이 피부를 베어 붉은 피 한 방울이 흘렀다. 백무진은 피하지 않았다. “천마 백무진.” 그 이름을 말하는 하연비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눈에는 증오만 있지 않았다. 두려움과 의문, 아주 오래된 슬픔이 섞여 있었다. “만약 제가 천마라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베겠다.” “지금은 못 벱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지?” “나를 죽이려 했다면 비무대에서 막지 않았을 테니까.” 하연비는 대답하지 못했다. 백무진이 낮게 물었다. “십팔 년 전 혈마곡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하연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어떻게 그 일을…….” “꿈에서 보았습니다.” “계속 꿈이라는 말로 빠져나갈 생각이냐?” “그렇다면 사부님도 하나 대답하십시오. 유정천은 왜 천마옥을 찾고 있습니까?” 쨍그랑! 하연비의 검이 탁자 위 약사발을 스쳤다. 사발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검은 약물이 흘렀다. 그녀는 약 냄새를 맡자 표정이 굳었다. “쇄맥독.” 백무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군요.” “이 약을 누가 가져왔지?” “소령이 약당 창고에서 가져왔습니다.” 하연비는 곧바로 문을 열려 했다. 백무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지금 움직이면 범인이 숨습니다.” “독이 든 약을 제자에게 먹이는 자를 그대로 두라는 것이냐?” “잡으려면 줄을 풀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에게 돌아가지.” 하연비가 자신의 손목을 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말투도 진서하의 것이 아니군.” 백무진은 손을 놓았다. “사람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 달라지는 법입니다.” “너는 달라진 정도가 아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 해도 지금 청운문의 제자인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청운문에 들어온 목적이 무엇이지?” “살아남는 것.” “그것뿐이냐?” “그리고 나를 죽이려는 자를 찾는 것.” 복도 끝에서 작은 비명이 들렸다. 소령의 목소리였다. 백무진과 하연비가 동시에 방을 뛰쳐나갔다. 약당 창고의 문이 열려 있었다. 바닥에는 깨진 약재함이 흩어졌고 창문이 크게 흔들렸다. 소령은 창고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어요.” 하연비가 검을 뽑고 창고로 들어갔다. 백무진도 뒤따랐다. 창고 안은 어두웠다. 선반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하연비의 검이 번개처럼 뻗었지만 그림자는 몸을 비틀어 피했다. 그자가 백무진을 향해 검은 침 세 개를 던졌다. 백무진은 몸을 돌려 두 개를 피했다. 마지막 하나가 심장을 향했다. 하연비가 검으로 침을 쳐냈다. 검은 그림자는 창문으로 달아났다. “내가 쫓겠다!” 하연비가 뒤따라 몸을 날렸다. 백무진은 바닥에 떨어진 침을 집었다. 끝에는 쇄맥독이 묻어 있었다. 침의 손잡이에는 작은 고리 일곱 개가 새겨져 있었다. 환상에서 본 복면인들의 표식이었다. 바로 그때 뒤쪽 선반에서 인기척이 났다. 백무진이 돌아섰다. 부상을 입은 검은 복면인이 약재 더미 사이에 숨어 있었다. 하연비가 쫓아간 자와 다른 사람이었다. 복면인이 단검을 휘둘렀다. 백무진은 손목을 잡고 팔꿈치를 꺾었다. 아직 내공은 미약했지만 상대도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단검이 떨어졌다. 백무진은 복면인을 벽에 밀어붙였다. “누가 보냈지?” “곧 그릇이 열릴 것이다.” 복면인이 웃었다. “그날이 오면 너는 네가 아니게 된다.” “무명천이라는 이름을 아느냐?” 복면인의 눈이 커졌다. 백무진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알고 있군.” “어떻게 그 이름을…….” “죽은 자에게 들었다.” 백무진이 복면을 벗기려는 순간 사내가 입안의 독을 깨물었다. 검은 피가 입술을 타고 흘렀다. “일곱 번째 하늘이 열리면 천마는 다시 죽는다.” 그 말을 끝으로 복면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백무진은 품을 뒤졌다. 작은 목패 하나가 나왔다. 앞면에는 일곱 개의 고리가 있었고 뒷면에는 ‘청운’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청운문 내부에 무명천의 사람이 있었다. 멀리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백무진은 목패를 소매 안에 숨겼다. 잠시 뒤 하연비가 돌아왔다. “놓쳤다.” 그녀는 죽은 복면인을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이자는 누구지?”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하연비가 복면을 벗겼다. 드러난 얼굴을 본 그녀가 숨을 삼켰다. “약당의 부당주…….” 십 년 넘게 진서하에게 독을 먹인 사람은 문파 밖의 적이 아니었다. 청운문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던 의원이었다. 하연비가 시신을 살피는 동안 백무진은 열린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중앙 봉우리 꼭대기에 누군가 서 있었다. 거리가 멀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흰 도복과 백발은 분명했다. 유정천이었다. 그는 모든 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무진과 유정천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마주쳤다. 노인이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돌아왔구나. 가슴속 천마옥이 세차게 뛰었다. 쿵. 백무진은 자신의 소매 안에 숨긴 목패를 움켜쥐었다. 전생의 원수, 사라진 흑룡대, 진서하의 몸에 봉인된 천마옥, 청운문 안에 숨어든 무명천. 십팔 년 동안 멈춰 있던 음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연비가 시신의 손바닥을 펼쳤다. 손금 사이에는 바늘로 새긴 듯한 작은 숫자 ‘칠’이 남아 있었다. “이 표식은 처음 봅니다.” “본 적이 없어야 정상입니다. 살아서 정체를 드러내는 조직이 아니니까.” “너는 알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백무진은 대답 대신 죽은 자의 손가락을 살폈다. 검을 잡아 생긴 굳은살보다 약재를 빻으며 생긴 흔적이 두꺼웠다. 부당주는 무인으로 위장한 의원이 아니라, 오랫동안 의원으로 살다가 최근 살수의 무공을 배운 자였다. “이자는 진서하가 청운문에 들어온 뒤부터 약을 관리했습니다.” 하연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사실도 기억하느냐?” “예. 매달 같은 날 저를 불러 직접 탕약을 먹였습니다. 몸이 약하니 빠뜨리면 안 된다고 했지요.” “그 탕약이 쇄맥독이었다면 오 년 동안 문파 안에서 제자를 죽이고 있었던 셈이다.” “죽이려 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지?” “정말 죽이려 했다면 더 쉬운 독을 썼을 겁니다. 이들은 제가 살아 있되 무공만 익히지 못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연비가 백무진의 가슴에 남은 용 문양을 바라봤다. “그 안에 있는 것 때문인가?” “아마도.” “그것이 무엇이지?”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오늘 처음 사부가 된 사람을 전부 믿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연비는 반박하지 못했다. 검을 거두며 낮게 말했다. “좋다. 대신 네가 문파를 해치는 행동을 하는 순간에는 내가 직접 벨 것이다.” “그 약속은 마음에 드는군요.” “무엇이 마음에 든다는 거지?” “적어도 등 뒤에서 찌르지는 않겠다는 말이니까.” 독고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무진의 표정에서 잠시 감정이 사라졌다. 하연비는 그 변화를 보았지만 묻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소령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연비가 말했다. “부당주는 독초를 정리하다 중독되어 죽은 것으로 처리한다. 범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약당주님께는…….” “누구도 믿지 마라.” 백무진과 하연비의 말이 동시에 나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소령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종루에서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첫 번째 종소리와 함께 중앙 봉우리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유정천이 떠난 자리에는 흰 구름만 흘렀다. 백무진은 깨진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빗방울 하나가 손바닥에 떨어졌다. 혈마곡에서 죽던 날에도 같은 비가 내렸다. 그때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적들은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열여덟 살 소년이라고 믿고 있었다. 무공도, 세력도, 이름도 잃었지만 전생의 기억과 깨달음은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자신을 죽인 자들이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무진은 소매 속 목패를 다시 꺼냈다. 달빛을 받은 일곱 고리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번들거렸다. 손가락으로 고리 하나를 누르자 목패 안쪽에서 가느다란 금이 벌어졌다. 그 틈에는 아주 작은 종이 한 장이 숨겨져 있었다. 종이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그릇이 깨어났다. 초승달이 뜨는 밤, 천검각으로 옮긴다.’ 다음 초승달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칠 일이었다. 천검각은 청운문의 장문인조차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는 금지였다. 그곳에 무엇이 있든 무명천은 자신을 그곳으로 데려가려 했다. 백무진은 종이를 손안에서 으깼다. 기다려 줄 이유는 없었다. 적들이 정한 날보다 먼저 천검각에 들어가 그들이 감춘 것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백무진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좋다.” 이번 생에도 누군가는 자신을 장기말로 쓰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천마는 누구의 그릇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가두려는 그릇부터 깨뜨릴 뿐이다. 천마 백무진의 두 번째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작품 정보
〈천마가 정파의 막내로 환생했다〉는 ka15624028 작가의 무협 웹소설이다.
조아라에서 연재 중이다.
연재 시작은 조아라 2026년 8월 30일이다.2026년 10월 27일 기준 연재 회차는 조아라 57화다.
최근 7일(10/21~10/27) 조회수는 조아라 38 늘어 누적 153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