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재능 있는 무용수, 정이재. 무대 위 눈부신 존재감의 대가는 가혹했다. 불우한 유년, 좆같은 인간 군상, 자극적인 루머. 급기야 이상성욕자의 스토킹이라는 비극마저 그를 옥죄어 온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정이재는 직접 스토커를 잡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와중 수상한 화가, 우기훈. 어두운 색채와 염세적인 소재, 비극적인 제목의 그림. 우기훈의 모든 행적은 정이재의 의심에 불을 피우기 충분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은 교묘하게 그를 비껴가는데……. 정이재는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고 소매를 당겨 잡았다. 옷 위로 스케치북 끄트머리를 잡은 그는 첫 장을 넘겼다. “우기훈… 이 새끼….” 거기엔 정이재가 있었다. 얼핏 보면 동세를 연습한 습작처럼 보였지만, 얼굴이 부정할 수 없는 정이재였다. “이거 스토커 아니어도 큰일 아니야? 나한테 꽂혔나 본데.” 데생일 뿐인데 명화 속 초상화처럼 섬세해서 더 변태 같았다. 그나마 이건 정이재의 일상을 그리긴 했지만. 그래도 소름 돋는 건 매한가지였다. “캣? 이건 또 왜 쓴 거야.” “봤군요.” “흐읍!”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정이재는 펄쩍 뛰었다. 손안에서 추락한 스케치북이 카드 마술처럼 촤르륵 펼쳐졌다. “끝까지 다 봤나요.” 그러고는 정이재가 그려진 ‘cat’ 페이지를 펼쳤다. 정이재는 삐걱거리는 목을 간신히 움직여 고개를 내저었다. 우기훈은 그런 정이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더 봐도 됩니다.” “…….” “마음껏 보세요.” 굵고 긴 손가락이 한 장을 더 넘겼다. 그곳엔 ‘rabbit’이라고 적힌 제목과 정이재의 그림이 있었다. 정이재로서는 앞서 해체된 토끼 그림을 떠올리는 일이 불가피했다. “어떤 게 마음에 들어요?” “뭐가…….” “당신은 고양이 같기도 하고, 토끼 같기도 해서.” “…….” “오늘은 토끼 같아요, 이재 씨. 건드리면 죽는 시늉을 할 것 같은 점이.” 파고들수록 더 깊이 얽히는 시선과 집착. 그의 시선은 뮤즈를 향한 동경인가, 아니면 소유욕인가. 가장 위험한 용의자와의 아슬아슬한 동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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