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로 모든 기억을 잃은 채 눈을 뜬 야렌. 낡은 오두막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말더듬이 고아, 길을 마주한다. “히익. 자, 자, 잘못했어요. 용더하세요. 용더하세요.” 이제껏 자신에게 학대당한 게 분명한 상처투성이 모습.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저 꼬질꼬질한 아이가 이 곤궁한 삶에서 유일무이한 자신의 편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기억도, 팔자에도 없는 육아를 하게 된 야렌은 돈을 벌기 위해 시골 마을 귀퉁이에 작은 의상실을 운영하게 되는데…. “죽여. 가장 비참하게.” 무언가 이상하다. 자꾸만 낯선 귀족의 기억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 * * “눈이 와요, 야렌.” 하늘을 바라보니 먼지 같기도 하고 작디작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을 수조차 없는 눈송이가 소록소록 내리고 있었다. “저는 남들보다 빠르게 알아차려요.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그리고 여름 끝자락에서 불어오기 시작하는 가을바람도….” “그러면 봄이 오는 훈풍도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차리겠구나.” 어디선가 들어 본 대사였다. 정확히 생각해 내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제 안에 기거하는 다른 이의 기억 혹은 추억에 기인한 것일 테지. 야렌은 두 눈으로 새삼스럽게 길의 얼굴을 담았다. “이제 말을 더듬지 않네.” “네, 네? 네.” 당황한 듯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가 제 눈을 피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야렌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제 앞에 충격적인 진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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