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조물주’라 불리는 유명 화가, 윤하윤. 트라우마로 인해 열여섯 나이에 안면실인증과 공황장애를 앓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누군가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는 일은 삶에서 가장 어려운 미션이었다. “혹시 그날, 우리한테 인상 깊을 만한 사건이 있었나요?” “우리가 잤냐고요?” 그런 그녀에게 남자가 되묻는데 하윤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와 함께 보낸 밤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이강일 씨, 저는 그쪽이 불편해요.” 돌아서는 순간에 그의 얼굴은 희미해질 것이었다. 안면실인증이라는 건 그런 면에서 꽤 유용했다. 하지만……. “당분간만 약혼자 행세를 좀 해 주세요.” 궁지에 몰린 하윤은 자존심을 굽힌 채 강일에게 도움을 청한다. “나를 이용하겠다는 건가요?” “대신 원하는 걸 드릴게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치명적인 남자라 해도 주고받을 것이 확실한 계약관계일 뿐. 하윤은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봄이 만발한 벚나무 아래에서,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자신을 덮쳐오기 전까지는. “감당할 자신, 있다며.” 약혼자 연기에 진심인 남자 때문에 가짜 연애의 벽이 조금씩 흔들린다. 제대로 무너지기 전에 그를 먼저 버려야 했다. “이강일 씨. 우리 그만 이 계약을 끝내기로 해요.”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눈은 그를 잊어도, 마음이 그를 기억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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