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
건물 모퉁이, 가로등 불빛이 겨우 손을 뻗는 자리에서, 한 남자가 벽을 짚으며 걷고 있었다. 걸음은 느렸고, 손끝은 벽의 결을 하나하나 확인하듯 움직였다. 다른 손에는 얇은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유이는 그 손짓에서, 자신이 건반 위에 새기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정교함을 읽었다. 표현을 위한 정교함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정교함이었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스케치북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 한 장이 빠져나와 바닥을 미끄러졌다. 유이의 발끝 가까이까지 흘러온 종이를 그녀가 무심코 집어 들었다. 종이 위에는 어두운 색이 넓게 번져 있었다. 검은색처럼 보였지만 완전히 검지는 않았다. 푸른 기색이 희미하게 섞여 있었고, 그 위로 가느다란 선 몇 개가 불규칙하게 겹쳐 있었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이는 종이를 들고 남자를 따라잡았다. 그가 걸음을 멈췄다. 유이가 손을 내밀자 남자는 잠시 허공을 더듬었다. 그녀는 그의 손끝에 종이를 조심스럽게 얹어주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종이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훑었다. 그리고 그것을 스케치북 사이에 다시 끼워 넣었다. 유이는 그제야 그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걸음을 늦추지는 않았다. 다만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사이, 마음 한구석에서 단어 하나가 조용히 떠올랐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안쓰럽다. 동정이라 부르기엔 너무 얕고, 관찰이라 부르기엔 너무 가까운 감정이었다. 방금 수백의 박수를 받고 나온 자신과, 벽을 더듬으며 어둠을 건너는 저 사람 사이에는 아무 접점도 없다고, 유이는 별다른 저항 없이 결론지었다. 그에게는 아마 이런 밤이 매일이었을 것이고, 자신에게는 오늘이 유독 특별한 밤이라는 사실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더 분명하게 했다. 그는 콘서트홀을 나설 때마다 마주치는, 그러나 마음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않는 밤의 풍경 중 하나로 남았다. 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그날 밤 그녀를 채운 것은 라벨이었고, 내일의 인터뷰였고, 다음 시즌의 레퍼토리였다. 조금 전 손에 닿았던 종이의 감촉도, 그 위에 번져 있던 설명하기 어려운 색도 오래 기억할 이유가 없었다. 택시 창밖으로 거리의 불빛이 흘러가는 동안, 그녀는 이미 다음 무대를 헤아리고 있었다. 오늘의 완벽은 이미 지나간 것이었으니, 그녀에게 의미 있는 것은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다음이었다. 그 무심함이, 훗날 얼마나 무거운 부채가 되어 돌아올지—그때의 유이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작품 정보
〈내일의 너에게 오늘의 안녕을〉은 김창훈 작가의 로맨스 웹소설이다.
리디·원스토리에서 연재 중이며 출판사는 유페이퍼다.
연재 시작은 리디 2026년 9월 8일이다.
평점은 리디 4.0점(1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