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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 모으기가 제일 쉬웠어요 (아르칸티아의 스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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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제21화] 전반부: 위대한 똥개 드래곤 ​대륙 남부의 거대한 산맥, ‘드래곤 스파인(Dragon Spine)’의 깊은 골짜기.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 험준한 바위산 아래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기구하고, 가장 변태적이며, 동시에 가장 슬픈 영혼을 가진 존재가 살고 있었다. ​그의 본명은 ‘베르데비어 폰 아보카도(Verdevere Von Avocado)’. 장구한 2,500년의 세월을 살아온 그린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귀한 본명을 혐오했다. 드래곤이라는 종족 자체를 경멸했다. 그는 스스로를 인간들의 언어로 ‘쌔디스(Saddis)’라 불렀다. 고통을 즐기는 자, 그리고 남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스스로가 더 아파하는 모순덩어리. ​그의 태생은 비극이었다. 어머니는 숲을 사랑하는 온화한 그린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파괴와 폭력을 일삼는 최악의 레드 드래곤이었다. 아버지는 1,500살밖에 안 된 어린 어머니를 힘으로 유린했고, 그 폭력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쌔디스였다. ​어머니는 쌔디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사랑할 수 없었다. 초록색 비늘 사이로 붉은 기운이 감도는 아들을 볼 때마다, 그녀는 자신을 망가뜨린 그 끔찍한 밤을 떠올렸다. “더러운 놈. 네 아비랑 똑같은 놈.” 그녀는 어린 쌔디스를 매일같이 때렸다. 발톱으로 할퀴고, 브레스를 쏘아대며 저주를 퍼부었다. ​어린 쌔디스는 울지 않았다. 아파야만 엄마가 자신을 봐주었으니까. 피를 흘려야만 엄마의 손길(비록 때리는 손길일지라도)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2,000년. 그의 영혼은 뒤틀릴 대로 뒤틀려버렸다. 고통은 곧 관심이고, 학대는 곧 사랑이라는 기괴한 공식이 뇌리에 박혀버린 것이다. ​성룡(成龍)이 되어 독립한 그는, 둥지(Lair)에 처박혀 우울증과 조울증을 겪으며 문득 깨달았다. ‘드래곤으로 사는 건 지루해. 너무 강해서 아무도 날 때려주지 않아.’ 그는 인간 세상을 동경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인간들의 ‘비루함’과 ‘잔인함’을 동경했다. 약하기에 짓밟히고, 약함을 감추려고 짓밟는, 그 역동적인 고통의 순환 고리. ​10년 전, 그는 마침내 유희(Amusement)를 결심하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 물론, 드래곤이라는 신분은 철저히 숨겼다. 8써클 마법 ‘폴리모프(Polymorph)’를 통해 완벽한 인간으로 변신했다. 그가 선택한 외모는 헝클어진 초록색 머리카락에, 병색이 완연하고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의 첫 번째 직업은 ‘인간 샌드백’이었다. 번화가 한복판, 목에 <때려주세요. 1대에 1실버. 비명 질러드림>이라는 팻말을 걸고 앉아 있었다. 처음엔 미친놈 취급을 받았지만, 술 취한 용병이나 스트레스받은 상인들이 하나둘씩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으악! 아파요! 더, 더 때려주세요!” 그는 실감 나게 비명을 질러댔다. (사실 드래곤의 육체라 모기가 문 것보다 안 아팠지만, 연기력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감이었다.) 그는 맞으면서 희열을 느꼈다. ‘그래, 이거야. 이 하찮은 주먹질. 내 아버지가 날 때리던 그 압도적인 공포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인간들의 이 찌질한 폭력성... 너무 귀여워.’ ​하지만 그는 단순히 맞기만 하는 변태가 아니었다. 어느 날, 자신을 실컷 두들겨 패고 돌아가던 용병이 골목길에서 강도를 만나 칼에 찔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쌔디스는 그 용병에게 다가갔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용병의 눈동자에서, 그는 어린 시절 학대당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불쌍한 녀석. 때릴 땐 언제고 이렇게 나약하게 쓰러져 있니.” 쌔디스는 눈물을 흘리며 8써클 회복 마법을 시전했다. “아프지 마. 아픈 건 나만 하면 돼. 넌 그냥 건강하게 살아서 나중에 또 나 때리러 와.” 그는 병 주고 약 주는, 아니 맞고 약 주는 기행을 일삼으며 대륙을 떠돌았다. 다친 강아지, 날개 부러진 새, 심지어 팔 잘린 오크까지. 그의 손길이 닿은 생명들은 기적처럼 되살아났다. ​그 후 그는 자이칸 제국으로 넘어갔다. 상업의 제국 자이칸. 그곳은 빈부격차가 극심하여 거지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쌔디스는 거지 길드에 가입했다. 그리고 드래곤의 비상한 두뇌를 풀가동해 ‘구걸의 과학화’를 선언했다. ​“형씨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으면 누가 돈을 줍니까? 각도가 틀렸어요.” 그는 칠판을 가져다 놓고 강의를 시작했다. “인간의 동정심은 시각적 자극 70%, 청각적 자극 30%에서 옵니다. 고개는 15도 숙이고, 눈동자는 살짝 젖은 상태로 45도 상방을 응시하세요. 그리고 목소리는 ‘솔’ 톤에서 시작해서 ‘미’ 톤으로 떨어뜨리며 떨림을 줘야 합니다.” ​그는 날씨, 요일, 행인의 옷차림에 따른 맞춤형 구걸 멘트를 개발해 보급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자이칸 제국의 거지들은 웬만한 중소 상인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거지가 마차를 타고 출근하고, 퇴근하면 비단옷을 입고 술을 마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하지만 쌔디스는 행복하지 않았다. “너희들... 이제 더 이상 불쌍하지 않아.” 배부르고 등 따스워진 거지들은 더 이상 그의 동정심을 자극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서 절박함이 사라지자, 쌔디스는 그들을 혐오하게 되었다. ​어느 달 밞은 밤. 쌔디스는 거지 길드의 금고를 털었다. 5년간 그들이 모은 막대한 재산. 그는 그 돈을 몽땅 훔쳐서 자신의 레어(Lair)로 텔레포트 시켰다.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들이 다시 바닥으로 추락해서 절망하는 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다시 ‘불쌍해져서’ 자신이 사랑해 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자이칸을 떠난 그는, 이제 더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찾아 에테리아 제국의 국경 지대로 흘러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운명적인(?) 직장을 찾았다. 바로 ‘와일드 고블린 부족’의 인간 노예. ​“케엑! 인간! 일해라! 굼벵이!” 고블린 대장이 채찍을 휘둘렀다. 짜악! 쌔디스의 등짝에 붉은 줄이 갔다. (물론 마법으로 피부를 연약하게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아윽! 잘모태써요! 떼리지 마세효!” 쌔디스는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기었다. 그는 지금 행복했다. 지능이 낮고 포악한 고블린들. 그들은 계산 없이 때리고, 이유 없이 굶겼다. 이 순수한 악의(惡意). 이 투박한 폭력. 거지들의 위선적인 삶에 지쳐있던 쌔디스에게 이곳은 힐링 캠프나 다름없었다. ​“이 썩은 빵이나 처먹어라! 켁케케!” 고블린이 곰팡이 핀 빵 조각을 흙바닥에 던져주었다. 쌔디스는 네 발로 기어가 그 빵을 허겁지겁 주워 먹었다. ‘음~ 이 쿰쿰한 곰팡이 향. 흙의 질감. 내가 정말 쓰레기가 된 기분이야. 짜릿해.’ ​그는 낮에는 고블린들의 짐을 나르고, 밤에는 그들의 샌드백이 되어주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입김 한 번으로 이 산맥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는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그러던 어느 날 오후였다. 고블린들이 낮잠을 자는 사이, 쌔디스는 족쇄를 찬 채로 숲속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새로운 독초가 없나 찾으러 나온 길이었다. (최근 독버섯을 생으로 씹어 먹고 거품 무는 연기에 재미를 들린 참이었다.) ​ 그때, 하늘에서 기이한 파동이 느껴졌다. ​‘응? 저건... 고위 마법사?’ ​저 멀리, 하늘을 가르고 날아오는 한 인간이 있었다. 에테리아 제국의 8써클 대마법사, 롬멜 공작이었다. ​롬멜은 지금 극한의 상태였다. 북부 발할라 제국 아래, 루미나스 왕국에서 제시아의 화분 두 개를 훔쳐낸 뒤 쉼 없이 날아왔다. 직선거리로 무려 1만 5천 킬로미터. 열흘 밤낮을 쉬지 않고 비행 마법과 은신 마법을 유지하며 날아온 탓에, 그의 마나 홀은 고갈 직전이었고 육체는 탈진 상태였다. ​“하아... 하아... 다 왔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수도야.” 롬멜은 휘청거리며 숲속의 커다란 고목 아래 착륙했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두 개의 화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완두콩이 주렁주렁 열린 화분. 그 영롱한 초록색 빛이 지친 롬멜의 눈을 유혹했다. ​‘이걸... 황제에게 바치기 전에...’ 롬멜은 갈등했다. ‘하나만. 딱 하나만 먹어볼까? 이 지긋지긋한 피로를 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호기심과 욕망, 그리고 극심한 피로감에 이성을 잃었다. 결국 그는 떨리는 손으로 콩 꼬투리 하나를 따서, 콩알 하나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끄아아아악!!!” ​롬멜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단순한 피로 회복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압축된 드래곤 하트급의 에너지 덩어리였다. 고갈된 롬멜의 마나 회로에 콩의 에너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텅 빈 독에 물을 붓는 게 아니라, 용암을 붓는 격이었다. ​“크허헉! 사... 살려줘...!” 혈관이 튀어나오고, 눈이 뒤집히며, 입에서 푸른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온몸의 뼈가 뒤틀리는 듯한 격렬한 경련. 마나 역류(Mana Backflow)였다. ​멀리 나무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쌔디스는 전율했다. 찌릿. 등골을 타고 오르는 짜릿한 전기. ​‘저거다... 저거야!’ 그는 롬멜의 고통에 매료되었다. 단순히 아픈 게 아니었다. 몸 안에서 거대한 에너지가 폭발하며 육체를 찢어발기는, 그러면서도 생명력을 강제로 주입하는 이중적인 고통. ‘나도... 나도 저거 먹어보고 싶어. 저 인간 표정 봐. 아주 예술이야.’ ​드래곤의 육체는 너무 강인해서 웬만한 독이나 물리적 타격으로는 고통을 느끼기 힘들다. 그래서 그는 항상 연기를 해야 했다. 하지만 저 콩이라면? 저 인간 대마법사가 죽을 둥 살 둥 구르는 걸 보니, 나에게도 꽤 쏠쏠한 자극을 줄 것 같았다. ​“으으... 억눌러야 해...!” 롬멜은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마나를 억눌렀다. 여기서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그는 거품을 문 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황급히 두 개의 화분을 챙겼다. “탑으로... 마법탑으로 가서... 진정시켜야 해...” ​롬멜은 다시 비행 마법(Fly)을 시전 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틀비틀, 위태로운 비행이었지만 속도는 빨랐다. ​“기다려, 아저씨! 나도 그 콩 한 입만 줘!” ​슈우웅— 누더기를 걸친 거지 꼴의 청년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의 눈은 콩에 대한 집착... 아니, 새로운 고통에 대한 변태적인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에테리아의 하늘 위. 도망치는 대마법사와, 그를 쫓는 변태 드래곤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물론 롬멜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의 뒤를 쫓는 것이 대륙 최강의 생명체이자, 대륙 최고의 돌아이(Psycho)라는 사실을. ​그 시각, 고블린 캠프. 잠에서 깬 고블린 대장은 쌔디스를 찾다가 빈 족쇄를 보고 어리둥절해했다. “어? 내 샌드백 어디 갔어? 밥도 안 먹고?” 그는 훌륭한 노예를 잃은 슬픔에 잠겼으나, 그 노예가 자신들을 ‘애완동물’ 취급하고 있었다는 건 영원히 모를 일이었다. ​하늘을 가르는 바람 소리. 쌔디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잡히면... 아주 혼쭐을 내주고 뺏어 먹어야지. 흐흐흐.” ​그의 유희 10년 차, 가장 흥미로운 장난감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제21화] 후반부: 가장 약한 드래곤의 탄생 ​에테리아 제국의 수도, 롬멜 공작의 사설 연구실. 돌아온 롬멜은 지친 몸을 이끌고 비밀 공간으로 들어왔다. 아직 뱃속에서는 콩 한 알의 여파로 마나 역류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화분을 어루만졌다. 완두콩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9써클? 아니, 신(God)이 될 수 있다. 루미나스의 그 촌구석 백작, 제시아라고 했나? 그 계집애가 만든 것이라니 믿을 수 없군. 언젠가 다시 가서 그 비법까지 뜯어내리라." ​롬멜은 혼자 중얼거리고는, 화분에 최고급 보존 마법과 3중 결계를 덧씌우고는 연구실을 나갔다. 황제에게 다른 화분 하나를 바치고 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참느라 주의력이 무뎌져서 알지 못했다. 그가 연구실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 천장의 환기구에서 녹색 머리의 청년이 거꾸로 매달려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제시아... 루미나스... 오호라, 주소 입력 완료." ​새디스였다. 그는 롬멜이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눈앞에는 롬멜이 목숨 걸고 설치한 8써클 결계가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건드리는 순간 재가 되어버릴 살인적인 트랩이었다. ​"아유, 귀여워라. 이걸 결계라고 친 거야?" ​새디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비록 나이가 어려서(2,500살) 아직 8써클 이지만, 드래곤 로드에게 전수받은 9써클 마법의 원리를 꿰뚫고 있었다. 드래곤어(Dragon Tongue)로 이루어진 술식 해석 능력은 인간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열려라, 참깨... 가 아니라, [해체(Disjunction)]." ​파아앗—! 새디스가 손가락으로 결계의 '매듭' 부분을 톡 건드리자, 그 복잡하던 마법진이 허무하게 스르륵 풀려버렸다. 마치 엉킨 실타래의 끝을 찾아 당긴 것처럼. ​"요인크(Yoink)!" 새디스는 화분을 통째로 품에 안았다. "잘 먹겠습니다, 아저씨. 덕분에 좋은 구경하고, 간식도 챙겨가요." ​그는 유유히, 그리고 아주 뻔뻔하게 다시 환기구로 사라졌다. 롬멜이 다음 날 새벽 겪게 될 절망과 분노는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드래곤 스파인 산맥, 새디스의 레어(Lair). 수천 년 묵은 먼지와 훔쳐 온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는 그의 보금자리에 도착한 새디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악... 하악... 드디어!" ​그는 화분을 바닥에 놓고 콩 꼬투리를 미친 듯이 깠다. 초록색 완두콩 16알. 콩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실로 막대했다. 롬멜이 한 알 먹고 죽을 뻔했던 그 콩이다. ​"저 인간이 한 알 먹고 탭댄스를 췄으니까... 16알을 한꺼번에 먹으면?" ​새디스의 눈이 뒤집혔다. 상상만 해도 전신이 짜릿해졌다. 드래곤의 강인한 육체조차 감당 못 할 고통. 내장이 녹아내리고 뼈가 가루가 되는, 생애 최고의 자학 파티가 열릴 것이다. ​"가자! 지옥으로!" ​그는 망설임 없이 16알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와작, 와작. 씹는 순간, 입안에서 핵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그의 뱃속에서 16개의 '압축된 자연의 심장'이 동시에 폭주했다. 그 에너지는 새디스의 심장 부근에 있는 '드래곤 하트(Dragon Heart)'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드래곤 하트는 마나를 생산하고 저장하는 드래곤의 생명 그 자체다. 하지만 새디스의 하트는 불완전했다. 레드 드래곤의 폭력성과 그린 드래곤의 자연 친화력이 섞이지 못하고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거기에 순도 100%의 '자연계 마나(완두콩)'가 들이닥친 것이다. ​쩌저적—! ​새디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몸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드래곤 하트였다. ​"......어?" ​균형이 깨졌다. 드래곤 하트가 산산조각이 나며 그 안에 담겨 있던 방대한 마력(Mana)이 완두콩의 에너지와 충돌해 소멸(Annihilation) 반응을 일으켰다. 엄청난 빛이 새디스의 몸을 뚫고 나와 레어 전체를 밝혔다. ​그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고통? 아니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모든 것이 빠져나가는 허무함. 영혼이 텅 비어버리는 듯한 상실감.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먼지 구덩이 속에서 새디스가 눈을 떴다. ​"살... 았나?" ​그는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팔다리는 붙어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항상 혈관을 타고 흐르던 그 넘쳐나던 힘, 산 하나쯤은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던 그 오만방자한 권능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내 마나! 내 하트!" ​그는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드래곤 하트가 있던 자리에는 휑한 구멍만 남아 있었고, 그 주변에 아주 작고 초라한... 딱 완두콩 한 알 크기의 '자연 마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생명을 유지해주고 있었다. ​16개의 콩 중 15개는 드래곤 하트와 함께 공중분해 되었고, 마지막 한 알의 기운만이 그를 살려놓은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새디스는 폴리모프를 풀고 본래의 드래곤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어? 안 돼... 변신이 안 풀려!" ​그에게 남은 마나량은 인간 기준으로 치면 '소드 익스퍼트 중급' 수준. 즉, 내공 30년 치 정도였다. 이 정도 마나로는 거대한 드래곤의 육체를 재구성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유지하고 있는 인간 형상(폴리모프)을 유지하는 데만 해도 남은 마나의 대부분이 쓰이고 있었다. ​"자... 잠깐만. 그럼 나..." ​그는 거울을 보았다. 초록 머리의 비실비실한 청년. 그는 이제 드래곤이 아니었다. 아니, 종족은 드래곤이지만, 힘은 보통 인간 기사 나부랭이보다 조금 센 수준인... 역사상 가장 약해빠진 도마뱀이 된 것이다. ​"망했다." ​새디스는 바닥을 쳤다. 이제 그는 몬스터를 만나면 도망쳐야 하고, 인간 강도에게 걸리면 진짜로 돈을 뺏길 처지였다. 예전의 '맞아주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맞고 멍들고 피 흘려야 하는 상황. ​처음엔 전율했다. "오오... 이것이 진정한 약자의 삶! 진짜 공포!" 하지만 3일 동안 굶어서 배가 고파지고, 지나가던 늑대에게 쫓겨 나무 위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자 현실을 자각했다. ​"이건 아니야... 이건 너무 리얼해. 아프기만 하고 재미가 없어!" ​그는 살길을 찾아야 했다. 드래곤 하트를 복구하려면? 엄청난 양의 고순도 마나가 필요하다. 그 완두콩. 그 콩을 만든 사람이라면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 ​"루미나스... 제시아..." ​롬멜이 중얼거렸던 그 이름. 새디스는 짐을 쌌다. 그리고 16,000km에 달하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고, 마법을 써도 불꽃놀이 수준밖에 안 되는 몸으로. ​두 달 뒤. 루미나스 왕국, 아발론 기사학교 정문. ​"거지네, 거지." "저리 가세요! 여기는 구걸하는 곳 아닙니다!" ​위병들이 코를 막으며 창대를 휘둘렀다. 그들 앞에는 넝마조각을 걸친, 피골이 상접한 초록 머리 청년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새디스였다. 레어에서 돈을 챙기는걸 까먹고 그냥 출발한 그는 두 달 동안 산 넘고 물 건너, 히치하이킹과 도둑질(실패해서 많이 맞았다)을 반복하며 겨우 여기까지 왔다. 신발은 다 닳아 맨발이었고, 얼굴은 땟국물에 절어 있었다. 그가 돈을 챙기지 않은 이유는, 원래 드래곤은 평소에 귀찮아서 돈을 안챙긴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레어에 가서 가져올수 있으니까 챙길 필요가 없는것이다. 평소 습관대로 그렇게 했지만, 지금의 그는 다시 레어에 가기가 쉽지 않은 몸이고, 혹시라도 트롤이라도 만나면 딱 죽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나... 거지 아니야... 나 제시아 만나러 왔어..." 새디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미친놈이! 감히 백작님 존함을 함부로 불러? 썩 꺼져!" 위병이 발길질을 했다. 퍽! "악!" 새디스는 데굴데굴 굴렀다. 예전 같으면 '아야, 더 때려줘요' 했겠지만, 지금은 진짜로 아팠다. 엉덩이뼈가 부서지는 줄 알았다. ​"씨... 두고 보자... 내가 힘만 찾으면 니들부터..." 그는 정문 옆 화단에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기다렸다. 배가 너무 고파서 화단의 잡초를 뜯어 먹으며. ​해가 중천에 뜨고, 다시 기울어지기 시작할 무렵. 학교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전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의 중심, 은색 건틀릿을 낀 소녀가 수제자 카시안과 함께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기다! 저 여자야!" 새디스는 잡초를 뱉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몸 속에 있는 마나 파동과 일치했다. 그는 위병들이 막을 새도 없이 튀어 나갔다. ​"제시아!!! 나 좀 살려줘!!!" ​제시아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건 냄새나는 거지꼴의 청년이었다. 카시안이 즉시 검에 손을 올리며 앞을 막아섰다. "물러나라! 백작님께 무슨 무례냐!" ​하지만 제시아는 손을 들어 카시안을 제지했다. 그녀의 은빛 눈동자가 새디스를 훑어내렸다. "......?" ​제시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 남자... 기운이 이상하다. 분명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몸 안에서 느껴지는 파동은 이상했다. 아주 미약하지만, 태고의 자연과 맞닿아 있는 순수하고 거대한... 하지만 텅 비어버린 껍데기 같은 기운.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의 몸 안에서 내 완두콩 냄새가 났다. ​"너, 뭐냐?" 제시아가 물었다. ​새디스는 울먹이며(연기가 아니라 진짜 서러워서) 외쳤다. "나... 콩 먹었어! 네가 만든 그 완두콩! 16개나 먹었다고! 근데 배가 너무 아프더니 힘이 다 빠져버렸어! 책임져!" ​"16개?" 제시아의 눈이 커졌다. 카시안도 경악했다. "스승님, 16개면... 폭발하지 않고 살아있는 게 기적 아닙니까?" ​나는 새디스의 손목을 덥석 잡고 진맥을 했다. 아르카가 내 머릿속에서 경보를 울렸다. [주인님! 이 녀석... 데이터가 안 잡혀! 인간이 아니야! 유전자가 꼬여있어. 그리고 체내 마나량은 딱 완두콩 1개 분량인데, 그게 전신의 세포를 억지로 붙들고 있는 형국이야!] ​"너... 정체가 뭐야?" 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새디스는 움찔했다. 드래곤인 걸 들키면 해부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는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거지 길드에서 배운 메소드 연기를 펼칠 때다.) ​"나, 나는... 북쪽에서 농사짓는 농부 '새디스'야!" "농부?" "어! 근데 어느 날 그 콧수염 난 아저씨(롬멜)가 우리 밭 근처 나무에서 쉬다가 뭘 떨어뜨리고 갔어. 냄새가 너무 좋아서... 배도 고프고 해서 주워 먹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이렇게 됐어!" ​거짓말이다. 하지만 롬멜이 화분을 훔쳐 갔다는 사실과, 그 콩을 먹었다는 정황은 맞아떨어졌다. 무엇보다 이 녀석, 16개를 먹고도 살아있다는 건 체질이 보통이 아니라는 증거다. ​"따라와." 나는 그를 데리고 마차에 태웠다. "논산으로 간다." ​논산 사관학교에 도착했을 때, 연병장은 한창 오후 훈련 중이었다. "8번! 온몸 비틀기! 머리 박아!" 지크프리트의 고함과 함께 500명의 훈련병들이 흙바닥에 머리를 박고 다리를 하늘로 쳐들고 있었다. 일명 '원산폭격'. ​마차에서 내린 새디스는 그 광경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우와..." ​그의 눈이 황홀경에 빠진 듯 반짝였다. "저거... 저거 뭐야? 머리를 땅에 박고... 피가 거꾸로 솟으면서... 엄청 괴로워 보이는데... 짜릿해 보여!" ​그는 10년간 찾아 헤매던 진정한 고통과 쾌락의 성지를 발견한 표정이었다. 맞아주는 건 수동적이다. 하지만 저건 능동적인 고통이다. 스스로 머리를 박고 지구의 중력을 오롯이 목뼈로 버티는 저 숭고한 자학의 행위! ​새디스는 제시아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백작님! 나 저거 시켜줘! 나도 저기서 머리 박고 싶어! 제발 입학시켜 줘!" ​나와 카시안은 어이가 없어서 서로를 쳐다봤다. 훈련이 힘들어서 도망가는 놈은 봤어도, 얼차려가 하고 싶어서 입학시켜 달라는 미친놈은 처음이었다. ​"너... 제정신이냐?" "제정신이야! 나 콩 먹어서 몸도 튼튼해! (사실 약해졌지만) 시키는 거 다 할게! 밥만 주고 저거 시켜주면 돼!" ​마침, 1중대에서 훈련을 못 견디고 야반도주한 훈련병 두 명이 있어서 결원이 생긴 상태였다. 나는 이 정체불명의, 하지만 콩 16개를 소화해 낸 기이한 '농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광기와 절실함, 그리고 알 수 없는 변태성(...)이 섞여 있었다. ​'재밌네. 이런 돌연변이가 들어오면 학교 물이 달라지겠어.' ​나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합격이다. 대신 넌 특별 관리 대상이다. 2인분 몫을 해야 할 거야." ​"감사합니다! 충성! 충성!" 새디스는 뛸 듯이 기뻐하며 당장 연병장으로 달려가려 했다. ​"잠깐, 옷은 갈아입고 가야지. 그리고 씻고 와. 냄새나." 나는 카시안에게 지시했다. "카시안, 이 녀석 씻겨서 '특공대'로 넣어. 맷집 하나는 좋아 보이니까." ​그렇게 역사상 가장 약하지만, 가장 변태적인 드래곤 새디스는 논산 사관학교에 입소하게 되었다. 그가 훗날 이 학교의 전설적인 '고문관'이자 '인간 샌드백'이 되어, 대륙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히든카드가 될 줄은 아무도 모른 채. ​"자, 새디스 훈련병. 머리 박을 준비 됐나?" "예! 언제든지 준비됐습니다!" ​그의 우렁찬 대답이 붉은 벽돌 학교에 메아리쳤다. 나의 농장에, 아주 기이하고도 강력한 잡초 하나가 뿌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

작품 정보

〈마나 모으기가 제일 쉬웠어요 (아르칸티아의 스승 이야기)〉는 달빛왈츠 작가의 판타지 웹소설이다.

조아라에서 볼 수 있는 완결작이다.

연재 시작은 조아라 2026년 2월 5일이다.2026년 10월 16일 기준 연재 회차는 조아라 71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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