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이었던 남자와 동시에 빙의했다. 나는 풍족한 가르시아 공작가의 메르엔 가르시아로, 애인은 빚을 잔뜩 진 비셀 자작가의 카일 비셀로. 저쪽 세계에서 5년, 이쪽 세계에서 5년. 도합 10년의 연애. 끝은 1년치 영지 생활비를 빌려달라는 그에 의해 산산히 부서졌다. “아무리 그래도 같이 지낸 정이 있는데 홀랑 다른 놈에게 한눈 파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넌 돌아갈 생각이 없어? 아, 그래. 무려 황태자가 주변에 껄떡거리는데, 전보다야 백 배 천 배는 나은 삶이지. 안 그래? 어?” 카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나를 후벼 팠다. "누가 보면 네가 메르엔 가르시아인 줄 알겠어?" 손에 쥘 수 없다면 자신이 있는 진창까지 끌어내리겠단 각오가 카일의 두 눈에 가득했다. 안다. 카일이 말하는 황태자, 제라르 벨무트의 소꿉친구는 내가 아닌, 원래의 메르엔이라는 거. 아는데도. '관계는 다시 쌓아나가면 돼, 괜찮아.' 5년 전, 기억을 잃었다는 내 말에 개의치 않다는 듯 처음부터 다시 쌓아나가면 된다고 말해주었던 소꿉친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밀어내기엔, 이미 늦어 버렸으니까. - "약혼을... 무르고 싶어." 내 말에 제라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말대로 추억을 다시 쌓는다면 나중에 해도..." "메르엔." 부드럽게 내 말을 끊은 제라르가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직시했다. "난 너와 친구로서 관계를 다시 쌓고 싶은 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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