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사교계에서 ‘시체 같은 영애’라 불리던 여자, 이벨린 로아. 타인의 고통을 대신 삼키는 능력을 지녔으나, 친아비의 손에 도구로 부려지며 평생 폭력과 어둠 속에 갇혀 살았다. 비스콘티 자작에게 팔려 가던 그날 밤, 그녀는 연회장에서 한 남자를 마주한다. 북부를 평정한 ‘제국의 미친개’, 카일러스 데미안. 천 년의 저주를 이어받아 끔찍한 고통 속에 살아가는 그 사내에게서, 이벨린은 누구도 보지 못한 소리 없는 비명을 읽어 낸다. “저를, 사세요.” 피를 토하며 그녀가 생을 걸고 내뱉은 거래. “당신의 그 지옥 같은 고통을, 제가 가져갈 테니.” 그렇게 이벨린은 북부의 대공비가 되었다. 그의 고통을 삼키는 도구로서, 부서져 가는 제 목숨에 슬퍼할 권리조차 없다 여기며. “너는 도구가 아니다.” 무심하고 잔혹하기만 하던 사내가,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곁을 맴돌기 시작한다. 빗속에 외투를 둘러 주고, 독배를 대신 들이켜고, 제 수명을 깎아 그녀를 지키며. 그러나 이벨린은 알고 있었다. 그의 마력을 정화하느라 제 심장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네가 무사히 숨을 쉬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내 숨도 트인다.” 서로를 살리기 위해 서로를 향해 제 모든 것을 깎아 내는 두 사람. 가장 비참한 불행으로 만난 그들은, 끝내 서로의 가장 간절한 구원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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