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첩보전에서 암약하던 루뱐카 군 정보 총국의 첩보원이자 상관을 살해한 죄로 처형이 확정된 사형수, 타티야나 벨라예프. “자리 하나 마련해 줄 테니 리튼으로 넘어가. 망명해.” “조국을 버리란 말씀입니까?” “동무한테 충성심이랄 게 있었나?” “아뇨.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어진 혹독한 훈련과 생체 실험에 이용당한 것도 모자라 국가에서 시키는 일은 다 했다. 한데 그 결과가 살인죄 누명과 처형이라면 배신 좀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좋아. 망명 조건은 하나. 간단해.” 루뱐카의 불법 첩보원 명단을 회수하는 것.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습니까?” “아니요. 없는데요.” 여러모로 쉬운 임무였다. 명단을 가진 도첸의 첩보원이 대뜸 어디서 본 적 있냐, 구닥다리 개수작을 부리는 바람에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담배 말고 다른 건 필요 없습니까?” “팁은 챙겨도 몸은 안 팔아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 “그거 말고.” 덕분에 남자를 유혹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술에 수면제를 타는 것도, 첩보원 명단을 바꿔치기하는 것도 쉬웠다. 이렇게 쉽게 망명해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해서 그때는 몰랐다. “신부님,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기는 한데, 우리 처음 본 거 맞습니까?” “…….” “수녀님, 정말 나 본 적 없어요?” 그를 다시 마주칠 줄은, 정말 몰랐다. 당연히 도첸의 첩보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함께 일할 동료라니. 1년 전에 제가 가로챈 명단 때문에 좌천당했다니. 망했다. 그냥 그때 죽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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