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깨부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잘못 태어난 놈이라고 생각했다. -한수혁 넓고 커다란 남자의 등은 마치 고아 소년의 그것처럼 외로워 보였다. -설수연 “나랑 같이 있을래?” “…….” “오늘 밤.” 남자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한순간에 알아차렸다. 나직한, 조용한, 심지어 부드럽게 들리는 독백 같은 말에는 한수혁 특유의 협박과 비웃음이 없었다. “알다시피 약혼녀가 있어. 걔랑 결혼할 거란 사실은 변하지 않아. 너와 내가 둘이서 무슨 짓을 하건.” 네가 싫어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한수혁식의 싸가지 없는 몰아붙이기도 없었다. 그냥 정직하게 자신이 가진 패를 설명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결코 유리하지도 않은 패. “내가 줄 수 있는 건 네가 바라는 건 아냐. 기껏해야 돈이거나, 선물 같은 거. 내가 줄 수 있는 전부야.” “내가 뭘 바라는데?” 수혁의 음성이 침착했다면 수연의 음성은 평소처럼 평온하지 않았다. 어쩐지 날 선 유리 조각처럼 들렸다. 그는 이토록 오만하고 일방적인 제안을 아주 조용하고 예의 바르게 하고 있었다. 마치 설수연을 흉내 내고 싶은 것처럼 그는 예의 바르게 말했다. “당신은, 쉽게 남자랑 즐기는 여자처럼 보이지 않아. 난 안 그래. 이딴 건 나한테 의미 없어.” “…….” “그냥 꼴릴 뿐이야. 마침 한번 하고 싶은데 눈앞에 네가 있을 뿐이야. 그게 전부야.”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치 고백처럼 들렸다. 장미 송이를 안겨 주면서 아주 오랫동안 사랑해 왔다는 말을 들려주는 연인처럼 그는 더러운 말을 하고 있었다. 한수혁을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이상하게 치밀어 올랐던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수연을 꽉 채운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그냥 안아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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