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엘렌. 입만 살아남은 공작부인 아나이스로 빙의했다. 존잘남 리시오 공작과의 첫날밤을 앞둔 채로. “산송장과 결혼했군.” 흑마법사의 습격. 그들이 건 흑마법이 그녀를 얼려 버렸다. “결혼식이 아니라 장례식 같지 않아요?” 꽃에 둘러싸여 손 하나 까딱 못 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관에 누운 시체 같기도 하다. 흑마법이 빼앗아간 그녀의 온기를 리시오가 채워준다. 그런데, 그 방법이……. 촘촘한 속눈썹이 서서히 들리며 유난히 푸르게 보이는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빛났다. 그리고 우세를 점한 침략자처럼 그의 혈색 좋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부끄러운가? 아니면 두렵거나.” “전혀요. 별것도 아닌 일인데요.” 태연한 척 대답하지 말았어야 했나. 짙어진 그의 미소에 덜컥 겁이 났다. 리시오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여 그녀를 가두듯 침대를 짚었다. “별것도 아닌데, 긴장 풀어, 아나이스.” 그의 얼굴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내려왔다. 마나 충전 완료! 이제 사건을 해결해 보자! 왜 아나이스의 몸에 빙의한 걸까. 신도의 고민을 헛소리라 치부하고 들어주지 않아 벌을 받은 걸까? 아나이스의 비밀을 쫓기도 바쁜데, 남편 리시오까지 괴롭힌다. 아니, 괴롭히는 게 맞나?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잖아! 차갑고 날카로운 말과는 달리 남자는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다정하게 군다. 게다가 잘생긴 얼굴로 자꾸 유혹해 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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