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릴리 에버린의 세계는 그를 중심으로 돌았다.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도 애정은 식지 않았다. “좋아하는 마음에 자존심이 어디 있어? 부끄러워하고 싶지 않아.” 자존심도 없냐는 비아냥에도 끝까지 리하르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에버린 가문의 몰락과 가족의 죽음이었다. "당신 오라비인 레오폴트 에버린도 죽었어요." 모든 것을 잃은 순간, 릴리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부질없는 환상이었는지. “리하르트, 넌 지금 혼란스러운 거야.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웃으며 반겨 주던 내가 더 이상 없으니까. 그래서 예전처럼 내가 다시 너를 좋아한다고 말해 주길 바라는 거지?” 그녀는 대답 없는 리하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원망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 무심한 눈빛이 오히려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긁어내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죽었어.” “…….” “네가 죽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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