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
광주에는 가을이 없었다. 적어도 야구장만큼은, 그렇게 느껴졌다. 해마다 찾아오는 가을 햇살은 뜨겁고 황금빛이었다. 도심의 느티나무는 주홍빛으로 물들어갔고,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붉은 단풍잎을 주워 모았다. 그러나 광주 블레이즈의 홈구장, 그곳만큼은 계절의 변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마지막 가을야구는 20년 전의 일이다. 그해 광주는 꿈을 꾸었고, 팬들은 잠 못 이루며 가을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그 짧은 불꽃이 꺼진 뒤, 팀은 다시는 그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계속되는 패배, 어긋나는 희망,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닳아버린 전광판 불빛.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구단 역사관에는 빛바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챔피언의 환호가 아닌, 언제나 그 직전에서 멈춘 표정들. 마운드 위에 서 있던 투수의 이름도, 마지막 타석에 섰던 타자의 표정도, 이젠 흐릿했다. 광주 블레이즈는 이름만 남은 팀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야구장은 여전히 매일같이 문을 열었다. 1루 쪽 스탠드는 해마다 페인트칠을 다시 했고, 훈련용 공들은 바람 빠진 채로도 한 켠에 쌓여 있었다. 언젠가 다시 계절이 돌아올 것처럼. “여기, 진짜로 가을은 안 오나 봐요.” 신입 구단 직원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구단 관리팀의 정 대리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마운드는 매년 그대로야. 이상하지?” 정 대리는 마운드를 가리켰다. 낡고 해진 경기장 한복판에, 마운드만큼은 유난히 반질반질했다. 언제라도 누군가 다시 올라설 수 있을 것처럼. 사람들은 그걸 ‘희망’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더 솔직한 이름은 ‘망각’이었다. 한때의 영광이든, 끝없는 추락이든, 모두 지나가면 결국 같은 자리였다. 빈 마운드, 비어 있는 관중석,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계절. 그해 여름, 광주 블레이즈는 또다시 최하위였다. 팬들은 구단의 공식 SNS에 냉소 어린 댓글을 달았고, 지역신문은 팀의 패배를 당연한 일처럼 적었다. “좀비 야구”, “추억팔이 야구” — 언론의 단어는 해마다 조금씩 더 잔혹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이곳을 지켰다. 한 달 전, 7월의 끝자락. 지독히도 무더운 날, 이상하게도 마운드 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처럼, 광주 블레이즈의 1군 명단에는 낯선 이름 하나가 올랐다. 팬들은 관심 없었다. 이름조차 생소한 신인 투수, 어느새 사라질 선수의 이름. 기대도, 환영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경기가 시작되었다. 야구장은 한여름의 열기로 가득했지만, 마운드 위에선 마치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공기가 달라졌다. 공 하나가 포수 미트에 들어가는 소리, 그 작은 울림이 모든 소음을 삼켰다. 기록지에도, 통계에도 남지 않을 순간. 그러나 분명히, 무언가 달라지고 있었다. 광주 블레이즈. 가을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운드 위에서, 계절은 늘 시작되고 있었다. 신인 마운드 위에 서면, 이상하게도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관중석에서 울려 퍼지는 야유도, 벤치의 무거운 침묵도, 스스로의 숨소리조차도. 마치 야구장 전체가 바람 속으로 녹아드는 것 같았다. 신인 투수의 이름은 강태준이었다.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못했고, 심지어 그의 등번호조차 기자들에게 낯설었다. 그가 던진 공은 빠르지 않았지만, 마운드를 휘감는 한기처럼 묘한 기운이 있었다. “공이 이상해.” 포수의 말이었다. 단순히 무브먼트가 좋은 게 아니라, 마치 한순간 계절이 바뀌는 듯한 착각을 주는 공이었다. 강태준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기록실에서도 그의 프로필은 몇 줄짜리 짧은 문장뿐이었다. ‘좌완 정통파, 지방 리그 출신, 22세, 최고 구속 144km.’ 이 짧은 단어들로는,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질 때의 기묘한 고요를 설명할 수 없었다. 팬들은 그의 이름을 쉽게 흘려보냈다. 광주 블레이즈의 마운드는 늘 그랬다. 새로운 투수가 올라와도, 이내 다시 잊혀졌다. 팀이 이기지 않는 한, 누가 마운드에 섰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패배는 이름을 지우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늦은 경기 종료 후. 야구장엔 아직 식지 않은 열기가 남아 있었다. 강태준은 마운드 위를 천천히 걸었다. 투수판 위에 서면, 한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였다. 빛바랜 조명이 비스듬히 그의 어깨를 비췄다. 스탠드 아래, 몇 명 남지 않은 팬들은 그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마치 묘한 기도처럼 보였다. “내일도 이 자리에 서 있을까요?” 구단 관리팀의 정 대리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허공으로 흩어지는 먼지처럼 가벼웠다. 그러나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언제나처럼, 이곳은 질문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때, 마운드 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한여름의 밤공기 속에서도, 가을의 냄새가 스쳤다. 이상하게도, 그 바람이 강태준의 공과 닮아 있었다.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공이, 바람을 닮은 것인지. 아니면 바람이, 공을 닮아가는 것인지. 광주 블레이즈는 여전히 20년째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가끔은 마운드 위에서 계절이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그런 소문이 있었다. 계속되는 연패 시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운드는 여전히 반짝였고, 관중석에는 한 줄기 바람이 스쳤다. 하지만 야구장의 공기만큼은 묘하게 무거웠다. 개막 첫 경기에서 광주 블레이즈는 완패했다. 두 번째 경기에서도, 세 번째 경기에서도. 공이 빠르지 않았다. 방망이가 무거웠다. 감독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갔고, 덕아웃에서는 말수가 줄었다. 마치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끝나버린 듯한 표정들이었다. “이제 겨우 세 경기 했을 뿐이야.” 코치가 투수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제’라는 단어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팬들은 SNS에 독설을 쏟아냈고, 구단은 그저 담담히 경기 결과를 업데이트했다. 매 경기 패배가 쌓여갔다. 4연패, 5연패. 서서히 ‘올해도 똑같을 거야’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마운드 위에서는 누군가가 매번 다른 이름으로 올라왔지만, 결과는 같았다. 빈 마운드와, 비어 있는 관중석. 그리고 팬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알 수 없는 정적만 남았다. 강태준도 마운드에 올랐다. 데뷔전 이후, 다시 기회를 받았다. 하지만 첫 이닝부터 볼넷이 이어졌다. 제구가 흔들리자, 포수의 사인은 거칠어졌다. 강태준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공은 흔들렸다. 속구는 포수 미트 옆을 스치고, 커브는 홈플레이트 앞에서 미끄러졌다. 덕아웃에서 코치의 손가락이 천천히 올라갔다. 투수코치가 걸어 나왔을 때, 마운드 위의 강태준은 마치 비에 젖은 나무처럼 서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짧은 한마디였다.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길. 관중석엔 팬이 거의 없었다.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그들은 또다시 잊을지도 모른다. 올라온 이름이 누구였는지조차. 경기 후, 덕아웃에서 선수들은 말이 없었다. 라커룸은 패배의 냄새로 가득했다. 땀 냄새와 먼지 냄새, 그리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의 냄새. 강태준은 조용히 유니폼을 벗었다. 샤워실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허공에 울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날 밤에도 마운드는 그대로였다. 마치 패배마저도 마운드의 일부인 듯, 부드럽고 묘하게 평온했다. 누군가는 여전히 묻는다. “올해도 가을은 없을까요?” 누군가는 고개를 젓고, 누군가는 허공만 바라봤다. 연패는 계속됐다. 시즌 초반부터, 가을은 멀어져만 갔다. 광주 블레이즈는 그렇게, 또 한 해를 잃어가고 있었다. 연패의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줄기의 희망 열두 경기째 패배. 덕아웃 안 공기는 더 이상 무겁다 못해 질식할 것 같았다. 선수들은 고개를 숙였고, 코치진은 벤치에 앉아 한숨만 내쉬었다. 팬들도 떠나갔다. 빈 자리가 훤히 드러난 관중석은, 마치 그들의 마음처럼 싸늘했다. 강태준은 그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덕아웃에서 가장 늦게까지 남아, 불펜에 들어갔다. 공이 잘 풀리지 않는 날도, 매일같이 피칭을 이어갔다. 손끝에 느껴지는 가죽공의 질감, 땅을 딛는 발의 떨림. 마운드 위에서만큼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포수 강민석이 그를 지켜봤다. 연패의 무게로 팀의 눈빛이 하나둘 죽어갈 때, 강태준의 눈빛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볼넷으로 마운드를 내려간 지난 경기 이후, 누구보다 묵묵히 준비하던 투수였다. “감독님, 태준이 공… 좋아졌어요.” 강민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벤치의 무기력에 조그마한 균열을 냈다. 다음 날, 감독이 강태준을 불렀다. “내일 경기, 선발로 나서보자. 던질 수 있겠어?” 강태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운드 위라면,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경기 당일. 햇살은 눈부시게 내리쬐었지만, 블레이즈의 분위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첫 이닝, 강태준은 천천히 와인드업을 올렸다. 심호흡을 길게 하고, 공을 던졌다. 포수 미트가 울렸다. 스트라이크. 그 울림이 덕아웃으로 번져나갔다. 두 번째 타자. 커브가 낮게 떨어졌다. 타자의 방망이가 허공을 가르며 돌아갔다. 강민석은 마스크 너머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좋아, 오늘 공 괜찮아.” 그러나 마운드는 언제나 쉽지 않았다. 3회 초, 볼넷 두 개가 연속으로 나왔다. 위기였다. 코치가 마운드로 천천히 걸어왔다. “어깨 힘 빼고, 네 공 던져.” 짧은 말이었지만, 강태준은 그제야 호흡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공, 또 한 공. 결국 병살타를 유도해 이닝을 끝냈다. 덕아웃에서 팀 동료들이 강태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잘 막았어.” 그 한마디가, 무너진 팀 분위기를 조금 일으켜 세웠다. 5회까지 던졌다. 3피안타 1실점. 불펜으로 내려오자, 관중석에서 작은 박수가 일었다. 그동안 듣지 못했던, 패배만이 남았던 자리에서 나오는 새로운 소리였다. 강태준은 그 소리에 마음이 뛸 뻔했다. 결국 경기는 패했다. 타선은 여전히 침묵했고, 팀은 또 하나의 패배를 기록했다. 그러나 경기 후 감독은 기자들에게 말했다. “오늘 강태준은 확실히 좋은 투구를 보여줬습니다. 앞으로 기회를 더 줄 생각입니다.” 그 말은 선수단 모두가 들었다. 밤늦게, 강태준은 혼자 마운드를 다시 찾았다. 경기장은 이미 조명이 꺼지고, 달빛만이 잔디를 비추었다. 마운드에 서서, 천천히 흙을 집었다. 손바닥 위의 작은 흙덩이.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텅 빈 관중석. 그 순간에도 그는 생각했다. “이곳에서, 다시 던질 수 있다.” 다음 날부터, 동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포수 강민석은 강태준을 불러 세웠다. “너, 진짜 괜찮다. 다음에도 같이 가자.” 패배로 가득 찼던 덕아웃에도, 작은 희망의 불씨가 살아났다. 비록 팀의 연패는 계속되었지만, 누군가는 보았다. 강태준의 공, 그리고 마운드 위에서만큼은 결코 꺾이지 않는 눈빛을. 가을의 문턱은 멀었지만, 그날 던진 공 하나가 분명히 무언가를 바꿔놓고 있었다. 연패의 끝 연패가 길어질수록, 팀의 숨소리마저 무거워졌다. 관중석은 반만 차 있었고, 경기장엔 패배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광주 블레이즈는 더 이상 팬들에게 기대를 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강태준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날도 그는 일찍 경기장에 나왔다. 선발 투수로 낙점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밤잠을 설쳤다. 하지만 새벽녘엔 이상하게도 마음이 고요했다. 마운드 위에서만큼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경기 전, 덕아웃은 적막했다. 강태준은 덕아웃 끝자리에 앉아 조용히 글러브를 만졌다. 포수 강민석이 다가왔다. “오늘… 끝내자.”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무겁고 단단했다. 1회 초, 상대 타선을 마주했을 때, 강태준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첫 공은 스트라이크존을 파고들었다. 포수 미트가 묵직하게 울렸다. 그 울림이 덕아웃으로, 관중석으로 퍼져나갔다. 두 번째 타자. 낮게 떨어지는 커브에 헛스윙. 강태준의 표정은 차분했다. 마운드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 2회, 선두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했다. 작은 위기. 그러나 강태준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강민석이 마운드로 천천히 걸어왔다. “네 공은 괜찮아. 흔들리지 마.” 포수의 짧은 격려가 마운드 위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던졌다. 손끝에 집중을 실었다. 낮게 떨어지는 직구, 바깥으로 흐르는 변화구. 강태준의 공은 예전과 달랐다. 볼넷을 연달아 내주던 그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과 리듬이었다. 3회 말, 드디어 팀의 타선이 살아났다. 1번 타자가 안타로 출루하자, 덕아웃에 작은 환호가 터졌다. 이어진 타구가 2루타로 이어졌고, 관중석에서 함성이 일었다. 오랜만에 들려온 뜨거운 소리였다. 팀은 선취점을 뽑았다. 강태준은 숨을 고르며 다시 마운드에 섰다. “이제 내가 지켜야 할 차례다.” 4회, 선두타자에게 다시 안타를 맞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강민석이 사인을 보냈고, 강태준은 그대로 따랐다. 빠른 공으로 몸쪽을 파고들자, 타자가 방망이를 접었다. 병살타. 덕아웃에서 팀 동료들이 소리 없이 주먹을 쥐었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승리를 믿고 싶었다. 6회까지 1실점. 강태준은 마운드를 내려올 때, 짧게 고개를 떨궜다. 덕아웃으로 돌아오자, 감독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다. 진짜 잘 던졌다.” 패배가 익숙해진 팀에서, 오랜만에 나온 진심 어린 칭찬이었다. 경기는 8회 말, 블레이즈가 추가점을 뽑으며 3-1로 앞서갔다. 관중석에선 함성이 이어졌다. 그 함성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간절하고 컸다. 9회 초. 마무리 투수가 마운드에 섰다. 강태준은 덕아웃 끝자리에 앉아, 묵묵히 경기를 지켜봤다.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잡히는 순간, 관중석이 일제히 일어섰다. 함성, 그리고 박수. 연패의 긴 터널을 끊는 그 순간, 광주 블레이즈의 이름이 다시 외쳐졌다. 덕아웃에선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기쁨을 나눴다. 강태준은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깨가 묵직했지만, 그 무게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오늘 마운드에서 던진 공 하나하나가, 패배의 사슬을 조금씩 끊어냈으니까. 경기 후, 관중석을 빠져나오는 팬들이 강태준의 이름을 불렀다. “강태준! 오늘 공 좋았어!” “다음에도 기대할게!” 그 짧은 외침이 마음을 울렸다. 강태준은 헬멧을 벗어 들고 고개를 숙였다. 마운드 위에서 흘린 땀이, 이 박수 소리로 씻겨내려가는 듯했다. 밤이 깊어갈 때, 강태준은 다시 마운드를 찾았다. 불 꺼진 경기장, 달빛이 마운드를 비추고 있었다. 흙을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려봤다. 패배만이 남았던 그곳에서, 오늘은 승리의 기억을 새길 수 있었다. 강태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이야.” 길었던 연패를 끊은 날, 광주 블레이즈는 다시 한 번 가을을 향한 계절을 꿈꾸기 시작했다. 부상 연패를 끊고 난 뒤, 광주 블레이즈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마운드에서, 덕아웃에서, 선수들 사이에서 오랜만에 웃음이 피어났다. 패배에만 젖어 있던 팀이, 다시금 승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강태준은 그 중심에 있었다. 연승이 이어질수록, 그의 투구는 더 단단해졌다. 빠른 공의 구위가 살아나고, 변화구의 궤적은 날카로워졌다. 포수 강민석은 “이제 진짜 너답다”고 웃으며 말했다. 팀 동료들도 달라졌다. 한때는 서로 눈치를 보며 무너졌던 선수들이, 이제는 매 이닝마다 파이팅을 외쳤다. 조용히 고개를 숙였던 감독도, 덕아웃 앞에 서서 직접 선수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승의 기쁨 속에도, 강태준의 몸은 조금씩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연이은 선발 등판, 긴 이닝 소화. 어깨에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은 경기가 끝나면 잊으려 애썼지만, 분명히 남아 있었다. “괜찮아?” 강민석이 캐치볼 중 물었다. “조금 뻐근해. 하지만 던질 수 있어.” 강태준은 애써 미소 지었다. 지금 멈추면, 다시 팀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매일같이 불펜에서 몸을 풀고, 매일같이 마운드 위에 올랐다. 7월의 어느 날, 팀은 5연승을 기록 중이었다. 상대는 리그 상위권 팀, 모두가 긴장하던 경기였다. 강태준이 선발로 예고되자, 팬들은 기대에 찬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1회부터 강태준은 위력적인 투구를 선보였다. 구속도, 제구도 완벽했다. 2회, 3회까지 실점 없이 막아내자 덕아웃에서 환호가 터졌다. 그러나 4회, 갑자기 느껴진 어깨의 통증이 순간적으로 그의 몸을 움켜쥐었다. 직구를 던지는 순간, 팔꿈치 아래로 찌릿한 통증이 번졌다. 강태준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마운드 위에서 내색하는 순간, 상대 타자도 눈치챌 테니까. 그러나 통증은 던질수록 깊어졌다. 5회 초, 2사 만루 상황. 팀이 2-0으로 앞서 있었지만, 위기의 순간이었다. 강민석이 마운드로 다가왔다. “태준아, 괜찮아? 네 팔 좀 이상해 보여.” “…조금 아프지만, 던질 수 있어.” 강태준은 이를 악물었다. 이 순간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강태준은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뒤틀었다. 낮게 떨어지는 변화구,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삼진. 마운드 위에서 주먹을 불끈 쥔 그의 모습에, 관중석은 함성으로 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강태준의 오른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강민석이 눈치를 챘다. “감독님, 바꿔야 합니다.”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고, 불펜 투수가 빠르게 몸을 풀었다. 마운드에서 내려올 때, 강태준은 관중석을 바라봤다. 환호와 박수. 그토록 원했던 순간이었지만, 강태준의 얼굴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어깨에 전해지는 묵직한 통증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경기 후, 트레이너가 진단을 내렸다. “어깨 염좌야. 한동안 공 던지는 건 무리다.” 강태준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대로 멈출 순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몸은 이미 한계를 말하고 있었다. 덕아웃에서 동료들이 다가와 등을 두드렸다. “네가 있어줬기에 이겼어.” “빨리 회복해.” 하지만 강태준은 고개를 떨궜다. 승리가 기쁘면서도, 마운드 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밤이 되자, 경기장은 다시 적막했다. 강태준은 불 꺼진 마운드를 천천히 걸었다. 손끝으로 흙을 만지며, 마운드를 올려다봤다. 오늘 이겼다는 사실도, 팬들의 환호도 한순간 스쳐갔다. 그저 마음속에 남은 건 하나. “내가 다시 서야 한다.” 팀은 분명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그러나 강태준의 부상은, 마운드 위에 새로운 계절이 오기 전에 찾아온 또 다른 시련이었다. 기나긴 재활 부상 판정이 내려진 후, 강태준은 침묵했다. 팀은 여전히 상승세였고, 연승 기록은 이어졌다. 덕아웃에서 동료들이 환호할 때도, 강태준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병원 진단서에는 어깨 염좌. “재활만 잘하면 돌아올 수 있어.” 트레이너의 말에도, 강태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에게 마운드는 모든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마운드에서 내려온 자신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재활센터의 첫날, 강태준은 한없이 무거운 기분으로 문을 열었다. 거울 앞에 선 모습은 낯설었다. 강속구를 던지던 투수가, 고무밴드를 잡고 팔을 천천히 돌리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해야 했다. “호흡부터 맞춰. 천천히.” 재활 코치의 말에 따라, 강태준은 숨을 고르고 동작을 반복했다. 처음엔 단순한 스트레칭조차 고통이었다. 팔을 들어올릴 때마다 통증이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훈련장 밖으로 나가면, 팀의 승전보가 들려왔다. 강태준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운드를 떠난 자신이 아직도 팀의 일부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처음엔 팔을 겨우 들어올리던 그가, 조금씩 가동 범위를 넓혔다. 밴드 훈련이 끝나면, 가볍게 캐치볼을 시작했다. 공이 손끝을 스칠 때마다, 강태준은 가슴이 뛰었다. “조금씩 돌아오고 있어.” 재활 코치의 짧은 말이, 그를 조금씩 웃게 만들었다. 그러나 웃음 뒤엔 언제나 불안이 찾아왔다. “내가 다시 저 마운드에 설 수 있을까.” 하루가 끝나면, 강태준은 불 꺼진 경기장을 찾아갔다. 관중석도, 덕아웃도 비어 있었지만, 마운드만은 변함없이 그곳에 있었다. 손끝으로 흙을 느끼며, 강태준은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돌아가자.” 복귀전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복귀전 날짜가 잡혔다 복귀전은 팀의 가을야구 진출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경기였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9월의 경기장. 마지막 3연전, 단 한 경기라도 패하면 가을야구는 물거품이 된다. 이미 1승1무를 기록한 상황이었다. 그 결정적인 순간, 선발 투수로 강태준의 이름이 발표됐다. 3개월 만의 복귀. 그의 이름이 전광판에 뜨자, 관중석이 술렁였다. “강태준!” 팬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부상을 딛고 돌아온 에이스를 향한 환호였다. 덕아웃에서 강태준은 긴 숨을 내쉬었다. 손끝엔 여전히 가벼운 떨림이 있었지만, 마음은 달랐다. 재활의 시간을 지나며 얻은 단단함이, 그를 다시 마운드로 이끌었다. 경기 시작 전, 감독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네 공만 믿고 던져라.” 짧은 한마디가, 그에게 큰 힘이 됐다. 1회 초, 첫 타자를 마주한 순간. 마운드 위에서 강태준은 모든 소리를 지웠다. 포수 강민석의 미트만 바라보았다. 첫 공은 묵직하게 포수 미트에 꽂혔다. “스트라이크!” 심판의 외침이 경기장에 울렸다. 두 번째 공, 세 번째 공. 예전보다 구속은 조금 떨어졌지만, 제구는 더욱 정교해졌다. 낮게 떨어지는 변화구에 타자가 헛스윙을 했다. 삼진. 마운드 위의 강태준은 고개를 숙이며 숨을 고르고, 다시 올라왔다. 2회 초, 갑작스러운 위기가 찾아왔다. 안타와 볼넷으로 주자가 쌓였다. 관중석이 긴장으로 술렁였다. 그러나 강태준은 천천히 마운드를 밟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포수 강민석이 마스크를 벗고 다가왔다. “여기서 흔들리지 마. 네 공이라면 분명히 먹힐 거야.” 강민석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강태준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몸을 뒤로 젖혔다. 몸쪽을 파고드는 직구. 타자가 방망이를 멈칫했다. 이어진 바깥쪽 슬라이더. 헛스윙 삼진. 위기를 넘긴 순간, 강태준은 미소를 지었다. 덕아웃에서 동료들이 박수를 보냈다. 3회, 4회. 강태준은 한 점도 허용하지 않았다. 팬들의 응원은 점점 커졌다. “블레이즈! 블레이즈!” 그 함성이 강태준의 귀를 울렸다. 어깨는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내가 돌아왔다.” 5회 말, 팀은 1점을 먼저 뽑아냈다. 덕아웃은 환호로 들썩였고, 강태준은 마운드 끝에서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6회 초, 다시 마운드에 섰다. 주자가 한 명 나갔지만, 흔들림 없이 병살타를 유도했다. 포수 미트에 공이 빨려들어갈 때마다, 강태준은 확신을 느꼈다. “이제 괜찮아. 다시 던질 수 있어.” 강태준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눈앞에서 동료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웃고, 울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글러브를 벗었다. 손바닥 위의 흙먼지가 반짝였다. 부상과 긴 재활의 시간을 견디며 다시 서게 된 마운드. 오늘, 그곳에서 던진 공 하나하나가 팀을 가을로 이끌었다. 경기 후,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강태준 선수, 복귀전이자 팀의 가을야구를 결정짓는 경기였습니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강태준은 짧게 웃었다. “마운드에 다시 설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팀이 하나가 됐다는 게, 그게 제일 기쁩니다.” 밤이 깊어가자, 경기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강태준은 홀로 마운드로 걸어갔다. 그곳에 서서, 오늘의 흙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이제 다시, 새로운 계절을 향해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작품 정보
〈마운드 위에 계절〉은 이동윤학생 작가의 스포츠 웹소설이다.
노벨피아에서 연재 중이다.
연재 시작은 노벨피아 2025년 6월 12일이다.2026년 10월 18일 기준 연재 회차는 노벨피아 1화다.